한편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자막의 배치는 <스카우트>가 담고 있는 어떤 역사적 서술에 대한 일종의 회피 수단이 아닐까 의심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지금까지 5.18을 다룬 영화들은 한결같이 그 당시를 회상하거나 그 이후의 트라우마를 조명했다. 올해 개봉한 <화려한 휴가>가 5.18의 서사에 있어서 현재진행형, 즉 'now'라면 <박하사탕>과 <꽃잎>같은 작품은 ‘after’일 것이다. 그렇다면 <스카우트>는 과거형, ‘before’에 해당된다. 그 시대적 징후들, 5.18 이전의 광주에서 발견된 전조들에 대해서, 또한 5.18을 통과한 이들의 눈으로 재발견될 수 있었던 불길한 시대적 기운에 대해서. <스카우트>가 픽션임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은 그 현장성을 담보로 육체를 지닌다. 커다란 사건의 전과 후에 대한 역사는 기록의 역사가 아닌 증언의 역사이며 목격의 역사다. 결국 5.18이라는 어떤 거대한 역사의 전후 관계는 사료가 아닌 구전을 통해 확인되는 불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결국 물증 없는 심증의 픽션은 <스카우트>가 5.18을 만나는 적절한 제안서다.
사실 <스카우트>는 코믹이라는 상업 영화의 장르적 목적이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허나 이것은 단순히 <스카우트>가 5.18의 직설적 심경을 토로하는 국한적 책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일종의 가이드 라인의 제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 이상일지라도 <스카우트>엔 5.18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선이 잠재되어 있다. 또한 <스카우트>의 5.18은 분명 영화의 픽션을 위한 논픽션의 효과적 치장물에 불과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는 간과되기 힘들다. 역으로 <스카우트>의 픽션은 그 논픽션을 위한 하나의 미끼이거나 혹은 역사적 텍스트를 소환하기 위한 허구의 장(場)에 가깝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상사의 임무를 대신해 광주에 내려가는 이호창(임창정)은 선동열 만나기 전까진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 이호창이 광주에 내려가게 된 사연은 단순히 우연이다. 하지만 말미에서 그의 광주행은 어떤 빚을 청산하기 위한 필연적 결과임을 직감하게 된다. <스카우트>는 어떤 오늘 이전에 존재했을 어떤 어제를 궁금하게 만든다. 호창의 집에 걸린 사진과 이야기 속의 단서들로 짐작해본 바, 10년 전 대학 유망주 투수였을 것이라 짐작되는 호창이 어째서 10년 뒤 선동열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대학 시절 닭살 돋는 애인 사이였던 세영(엄지원)과 호창은 어째서 소원해진 것인지, 만나야 할 선동열은 털끝조차 보이지 않는 <스카우트>의 중반까지 극을 이끌어 가는 건 호창의 좌충우돌 스카우트 비사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얼핏 봐도 의심스러운 호창의 과거사다. 또한 그 자신조차도 몰랐던 그의 과거에 얽힌 진실이 현실 위로 오버랩 되는 순간, <스카우트>의 웃음이 품고 있던 어떤 불안한 징후는 일거에 폭발한다. 호창의 의심스러운 과거사보다 더 의심스러운 시대적 과거사가 그를 대신한다.
그 불안한 징후는 단순히 5.18 직전 광주의 어떤 표정일 수도 있고, 호창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했던 무심결 속의 진실일 수도 있다. 7년 전, 이소룡의 갑작스런 죽음처럼 급작스럽게 호창을 급습한 세영과의 이별은 마치 의도된 은폐처럼 시간 속에 묻혀가다가 광주에서 재회한 세영을 통해 다시 떠오른다. 7년의 시간 동안 호창과 세영의 인생은 그들의 어그러진 관계처럼 많이 변했다. 그건 마치 5.18 이후, 어그러진 광주와 타지의 관계 그리고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변화와도 같다. 선동열이 누군지 잘 몰랐던 1980년 광주는 분명 5.18의 학살의 기운도 확실히 감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곧 직할시로 승격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있기도 한다. 너무나도 동떨어진 두 개의 생소한 가치가 한 시대와 공간에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후천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시대의 관객에게 그 공간적 아이러니를 거머쥐게 만든다.
동시에 시대가 지닌 보편성과 특수성의 인과 관계가 유추된다. 특별한 개인의 역사가 선동열이라면 특별하지 않은 다수의 시대는 5.18이다. 이 두 개의 상징성은 광주에 있었고, 이는 각각 시대와 역사의 경계선을 구분한다. <스카우트>는 그 개인의 역사가 존재했던 다수의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광주의 아들 선동열’은 어쩌면 5,18의 비극 속에서도 광주가 지켜낸 하나의 숭고한 가치이자 그 시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살아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스카우트>는 그 공간이 지니고 있는 탄탄한 소재의 육체적 기운을 제구하기 위해 실존하는 인물을 스카우트한다. 전설 같은 시대의 생동감을 구현하기 위해 현존하는 인물을 소재로서 캐스팅한다. 결과적으로 이는 적절함 이상의 절묘함으로 구현된다. 선동열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들어선 호창은 광주를 바라보는 타지인이며, 궁극적으로 5.18을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광주 외부의 누군가가 됐을 가능성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전두환에 비호감을 표하는 세영-머리 까진 아저씨가 뭐가 멋있어요?-을 통해 광주의 기운을 직접 체감하고, 동시에 광주에서 벌어지는 시위의 현장에 우연찮게 뒤섞이기도 한다. 동시에 그 현장 밖에서 광주를 바라보는 외부인의 어떤 비아냥을 전파하기도 하며-너는 요즘 네가 큰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민 운동하고 그러는 거 다 겉멋 아냐?- 동시에 외부인의 걱정 섞인 우려-얼굴도 예쁘장한 아가씨가 무슨 데모를 하고 그래?-를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호창이 마지막에 발견할 수밖에 없는 자책감의 표정은 그 현장에서 완벽히 분리됐다고 믿는 타자화된 자신이 그 현실에 남모르게 일조하고 있었다는 배신감이다. 자신은 한치의 잘못이 없을 것이라 믿었던 민무늬같은 기억에 그어진 줄무늬의 진실, 자신도 모르게 ‘내가 모르는 사람 같아’져버린 찰나의 휩쓸림. 그 봉인된 기억이 풀리는 순간의 자책감은 시대적 아픔으로, 개인의 지독한 원죄로 순간 뿌리내린다.
동참할 수 없게 타자화되버린 외부인의 죄책감과 내부에 고립된 이들의 막연한 배신감은 오랜 세월 동안 광주와 그 외지를 가로막는 장벽 같은 오해로 쌓여 여전히 숭고한 역사를 고립시키고 있다. <스카우트>는 그 장벽을 형성하는 각자의 심리에 주목하며 동시에 그 내면에 잠재된 본심을 끌어낸다. 그 현장에서 차단된 타지인의 죄책감과 허탈감을, 그 현장에 고립된 내부인의 배신감과 무력감을.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된 깊은 오해를 풀기 위한 악수처럼 <스카우트>는 고백 같은 어떤 결의를 촉구한다. 마치 시대가 갈라놓은 로맨스의 비극처럼, 시대에 의해 지정학적으로 조장된 오해의 심리는 역시나 비극적이다. 호창과 세영이 주고 받는 ‘미안해’란 사과는 어쩌면 다시 그 시절을 되돌릴 수 없음을 자각하는 슬픔의 언사지만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견뎌낸 시절의 아픔을 공유하고 대물림하지 말자는 현재의 청사진일 것이다.
그 오랜 비극을 풀기 위한 숙원의 해결사처럼 타석에 들어선 <스카우트>는 날카로운 선구안을 뽐낸다. 웃음이란 구속의 위력과 시대적 재현의 안정적인 제구력, 그리고 역사적 시선이 투영된 날카로운 변화구까지, <스카우트>는 상업적 재주와 작품적 기질을 두루 갖춘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시대를 바라보게 만드는 탁월한 제구력이야말로 <스카우트>의 국보급 감각일 것이다.
2007년 11월 8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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