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토마토>는 가난을 짊어진 하층민의 고단한 일상을 비참할 정도로 끔찍하게 묘사한다. 지저분한 얼굴과 옷차림의 아이, 심술로 발화된 삶의 체증을 한 가득 질어진 할아버지의 표정, 어떤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은 사회적 최하층민의 삶을 이미지로 대변한다. 말 그대로 <방울토마토>에서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삶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삶이 거짓이라고 부연할 수는 없다. 분명 그런 참혹한 일상을 두르고 살아가는 이는 이 땅에 드물지 않게 존재하는 법이므로. 허나 <방울토마토>는 이를 통해 보편적인 슬픔을 끌어내고 관객에게 심적 통증을 권고한다. 진창 같은 비극적 삶을 전시함으로써 이를 통해 비통한 감정을 양산한다.
굽이굽이 돌아서라도 돌아오겠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손녀의 아버지는 통장을 들고 도망간 후행적조차 알 수 없고, 그 와중에 입에 풀칠하게 해주던 일자리도 사라졌다. 게다가 비좁은 집구석마저 강제 철거당하며 길바닥에 내앉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라는 순간마다 더욱 잔혹한 현실로 그들은 내던져진다. 결말은 지독할 정도다. 한치에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곳은 빈부의 격차가 영락없이 인간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본주의적 패악의 세계다. 이를 통해 <방울토마토>는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양산된 양극단의 계급을 묘사한다.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는 기르는 개조차 한우를 먹이고, 어떤 이는 밥 한끼 사먹을 돈 없어 남이 먹다 남긴 국그릇을 몰래 훔쳐 마시다가 그 안에 버린 쓰레기까지 입에 담는다. <방울토마토>엔 비판의 수위를 넘겨버린 자본주의적 적대감이 넘실거린다.
전체적으로 중심인물들의 사연은 일관적인 흐름과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관계가 불확실한 몇몇 캐릭터들이 시간을 소모시키듯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야기의 얼개는 듬성듬성 불안함을 드러낸다. 물론 할아버지와 다성이의 주거침입(?) 에피소드는 나름의 묘미를 지닌 창의적인 플롯이라 평가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이음새가 부실하고, 다소 극단적인 양상의 비극적 내러티브는 시종일관 어떤 혐의를 야기시키는 것이라 다소 불편하다.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대립적 관계로 배치시킴으로써 관객이 빈곤한 노인과 손녀를 그 비극적 알레고리의 피해자로 쉽게 인식하게끔 유도당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결국 가난을 비극적 볼모로 삼아 관객의 눈물을 소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지독하게 비극적인 양상 속에서 허덕이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끝끝내 비극을 맞이하는 이 무지막지한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남는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 아니면, 빈자의 지독한 현실적 슬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비극이 몰아친 뒤, 황폐한 땅 위에 홀로 남은 노인의 곁에 방울토마토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 방식은 이리도 얄팍하다. 제작의도는 고결했을지 몰라도, 가난한 이들의 비극적 에피소드를 적극 활용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기에 용이한 결과물은 지독하게 황폐하고, 간악하다. 이는 연륜만큼이나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신구의 열연과 어린 나이에도 또박또박 제 연기를 하는 김향기의 호연을 제물 삼아 이뤄진 것이라 더더욱 악취미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지닌 일말의 미덕은 희망을 결코 무책임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만든다는 점이다.
2008년 5월 31일 토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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