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자마자 질병으로 인해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은 미셸(라니 무커르지)의 세상은 완벽한 암흑이다.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는 소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팔다리를 휘젓고 괴성을 지르는 것뿐이다. 미셸이 여덟 살이 되던 해 부모는 마지막 희망으로 특수학교 교사 사하이(아미타브 밧찬)를 고용한다. 청각, 시각 장애인들에게 말하는 법과 문자를 가르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여겼던 사하이는 미셸을 만난 후 그녀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다.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던 미셸을 붙들고 가르치기를 여러 날, 사하이의 집요한 노력과 열정은 마침내 미셸의 암흑 같은 삶에서 작은 출구를 찾아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소녀라는 인물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블랙>은 헬렌 켈러의 인생 역정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미셸은 헬렌 켈러, 사하이는 설리반 선생인 셈이다. 실제로 헬렌 켈러 재단에서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영화는 청력과 시력을 모두 상실한 소녀가 어떻게 사물과 단어의 관계를 인지하고 세상의 이치에 눈을 뜨게 되는지를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한다. 사하이가 미셸을 교육하는 방식은 오로지 촉각을 통해서다. 미셸에게 사물을 쥐어준 뒤 말하는 자신의 입술을 만지게 하거나 그녀의 손과 팔에 단어를 적어주는 식이다. 수없는 실패와 좌절 끝에 마침내 그녀가 물을 깨닫고 'water'라는 단어를 처음 내뱉는 장면은 예상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뜨거운 감동을 선사한다. 미셸의 고통과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이야기의 진정성을 강화한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로부터 절대적인 영감을 받았지만, <블랙>은 몇몇 영화적 요소들로 이야기에 입체성을 입힌다. 영화의 시작은 중년이 된 미셸과 노년의 사하이가 재회하는 장면. 이후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미셸의 인생역정을 탄력 있게 풀어나간다. 플래시백 구조는 비단 미셸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만이 아니라 미셸과 사하이의 관계로 시선을 넓힌다. 여기에 사하이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한때 미셸이 살았던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설정은 <블랙>이 한 인간의 인생사를 넘어 소통과 연대에 관한 영화임을 보여준다.
기대치 못한 정극의 요소들로 가득하지만 <블랙>은 역시 인도산 향신료가 배어있는 인도영화다. 춤과 노래는 찾을 수 없지만 과장된 어조로 희비극을 강조하는 인도영화만의 연출은 여전하다. 음악은 끊이질 않고 배우들의 몸짓은 춤이라 해도 좋을 만큼 크고 분명하다. 비극을 다루는 연출은 다분히 연극적이다. 카메라는 종종 그대로 멈춰 마치 연극무대를 비추듯 배우들의 연기를 담는다. 이런 카메라의 움직임이 단조롭지 않은 이유는 세심하게 공들인 미장센 덕이 크다. 영상의 일부를 채우는 그림과 조각이 아니더라도 정밀한 화면 구도와 그림자의 음영에까지 신경을 쓴 영상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을 주된 질료로 삼았던 중세 미술을 연상케 한다. 이런 성서적 뉘앙스는 영화의 비극성을 더욱 고취시킨다.
하지만 과장된 연출이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도 영화 특유의 연출법은 그저 그런 감동 신파물로 끝날 수도 있었을 영화에 개성을 불어넣는다. 무엇보다 미셸의 고통과 환희를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배우들의 격앙된 음성은 미셸과 대조를 이루며 그녀의 적막한 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커다란 몸짓은 관객이 미셸의 언어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과장됐지만 고도로 계산된 움직임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치매노인이 된 사하이와 세상에 눈을 뜬 미셸이 함께하는 장면을 보라.
배우들의 연기는 영상만큼이나 아름답다. 인도의 국민배우로 불리는 아미타브 밧찬과 라니 무커르지의 연기는 캐릭터의 감정을 살릴 뿐 아니라 신파로 치우칠 수 있는 영화의 완급조절까지 해낸다. 인간적이면서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아미타브 밧찬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어린 자말이 똥통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사인을 받고자 했던 그 배우.
비록 2005년 제작된 영화지만 <블랙>은 '인도영화'하면 발리우드 뮤지컬만을 떠올리는 관객에게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소재와 형식, 영상, 연기가 기막힌 조화를 이루 <블랙>을 보기로 했다면 인도영화에 대한 그간의 편견은 잠시 접어도 좋다.
2009년 8월 25일 화요일 | 글_하정민(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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