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 삶을 살아온 영혜(채민서)는 악몽을 꾼 후 채식을 결심한다. 냉장고에 있는 고기는 죄다 버리고 오로지 채식만 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족들은 낯설음을 느낀다. 어느날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도중, 영혜에게 그녀의 아버지(기주봉)는 억지로 고기를 먹이기 위해 폭력을 가하게 된다. 급기야 폭력을 견디지 못해 과도로 손목을 긋는 그녀. 이후 영혜는 언니 지혜(김여진)의 보살핌을 받는다. 지혜의 남편인 민호(김현성)는 우연히 영혜가 스무 살까지 몽고반점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비디오 아티스트인 민호는 예술적 영감을 얻게 되고 영혜를 찾아가 모델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채식주의자’. 제목만 들으면 음식영화이거나 지구의 온난화를 막기 위한 사람들의 고군분투가 펼쳐질 다큐멘터리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영화는 인간의 폭력성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를 꿈 때문이라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술만 마시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모습을 플래시 백으로 삽입하여 폭력적인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의 내면을 드러낸다. 이를 바탕으로 고기를 얻기 위해 동물을 죽여야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폭력이 오버랩 되면서 그녀의 채식주의 선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또한 그녀의 몽고반점은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 순수성을 나타내는 몽고반점은 그녀가 폭력으로 물든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채식주의자>는 영혜를 중심으로 민호와 지혜를 등장시키며 그녀의 순수함에 따른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보여준다. 민호는 비디오 작업을 통해 점점 그녀의 매력에 빠져든다.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줬던 몽고반점에 매료된 그는 이내 순수한 그녀를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로 인해 형부와 처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사실을 안 지혜는 오로지 동생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그녀를 정신병원으로 옮기고, 치료에 매진한다. 하지만 그녀 또한 자신의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정작 영혜가 원하지 않는 치료까지 서슴지 않는다. 둘 다 영혜가 순수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의 욕망에 빠져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영화는 한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이중 민호와 영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몽고반점’은 2005년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임우성 감독은 영화 속에서 ‘몽고반점’을 다른 단편들 보다 좀더 집중적으로 다룬다. 민호의 제안으로 온 몸에 꽃을 그린 영혜의 모습과 욕망이 집착으로 변해 그녀의 몸을 탐하게 되는 민호. 이처럼 ‘몽고반점’은 글보다는 영상으로 구현했을 때 강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그녀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탐욕으로 얼룩진 그의 추함이 절묘하게 합일을 이루며 관객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특히 채식만 하는 영혜의 마른 몸을 보여주기 위해 8kg을 감량한 채민서, 동물적 욕망에 사로잡힌 민호의 캐릭터를 위해 10kg의 체중을 늘린 김현성의 노력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는 영상미에 집중한 나머지 원작에서 느꼈던 각 인물들의 심리를 온전히 담지 못한다. 감독은 최대한 원작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원작에 나온 대화 지문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채 배우의 대사로 옮겨 놓는다. 그러나 영화는 대사보다 캐릭터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내면에 감춰져 있는 심리적인 감정선을 놓친다. 특히 영혜는 앙상한 뼈마디와 온몸에 그려진 꽃의 이미지로 감정을 표출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영혜를 끝까지 돌봐주는 지혜도 영혜의 이미지에 짓눌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발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결국 <채식주의자>는 원작을 영상으로 옳기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나 인물들의 심리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2010년 2월 17일 수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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