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에피소드는 임필성 감독의 <멋진 신세계>다. 물론 멸망 직전의 인류가 멋질리 없다. 반어법이다.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버린 썩은 사과가 변이를 일으킨다. 이 사과를 분쇄해 만든 사료가 소의 입으로 들어간다. 소는 다시 인간의 밥상 위로 올라온다. 소를 먹은 인간들이 하나씩 좀비로 변한다. 영화는 바이러스의 유통과 확산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카메라에 담는다.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을 그린 스티븐 소더버그의 최신 영화 <컨테이젼>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하지만 <컨테이젼>처럼 객관적인 진실 전달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능한 정부, 개념 없는 지식인 등을 끌어와 풍자하고 조롱하고 연민하며 깔깔깔 웃는다. 약점이라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신선도에 바람이 빠졌다는 점이다. 먹거리 문제와 정치풍자의 만남은 이제 주말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제때 개봉했다면 정말 인류 종말에 대한 보고서가 될 뻔했는데, 아쉽다.
두 번째 에피소드 <천상의 피조물>은 김지운 감독의 손끝에서 나왔다. 장르를 워낙 신출귀몰하게 오가는 연출가라, 로봇을 등장시켰다고 해도 놀랄 건 없다. 영화는 로봇이 사람을 뛰어넘었을 때 생겨나는 충돌을 통해 존재론적인 문제에 다가간다. 비주얼이 우수하다. 로봇이 열반에 오른다는 설정도 독특하다. 그렇다고 해서 주제나 소재가 특출할 건 없다. 로봇이 존재론적 고민에 휩싸이는 건, 할리우드 영화의 정공과목이니 말이다. 아쉬운 건, 이를 풀어내는 방식이다.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대사에 구겨 넣어 설명하다 보니 지루하다. 현학적인 대사들은 지루함을 가중시킨다. 여러모로 영화보다는 연극에 어울리는 포맷이다. 박해일(로봇 목소리), 김강우, 김민선 등 인지도 높은 배우들이 나오지만 딱히 인상적인 무언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감독과 배우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심심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다시 임필성 감독이다. 앞선 두 에피소드와 달리 작년에 완성됐다. 제목은 <해피버스데이>. 소녀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당구공이 인류를 위협하는 혜성이 되어 지구로 돌진한다는 이야기다. 세 작품 중 아이디어가 가장 번뜩인다. 인터넷 주문을 인류 멸망과 연결한 발상도 독특하지만, 멸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가지각색 대응방식도 재기발랄하다. 배꼽을 잡게 하는 임필성 감독의 (의외의) B급 유머가 빛을 발한다. 단점이라면 몇몇 풀리지 않은 의문을 남긴다는 점인데, 그래서일까. 장편 영화로 만나고 싶은 작품을 고르라면, 여지없이 이 에피소드를 꼽겠다.
한국 SF 장르의 역사는 그야말로 가난하다. 한때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예스터데이> <내츄럴 시티> <원더풀 데이즈> 등이 척박한 시장에 도전장을 냈지만 제작비의 반도 회수하지 못하고 후퇴하며 상황을 악화시켰다. 의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과연 국내 관객들이 SF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국내 SF 영화들의 완성도가 할리우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관객들이 외면하는 걸까. 개인적으로는 후자라 생각한다. 그래서 김지운 임필성이라는 주류 감독들이 들고 나온 <인류멸망보고서>에 기대가 더 컸는지 모른다. 김지운 감독은 제작보고회에서 “<인류멸망보고서>가 한국적 SF의 꿈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자극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남을 듯하다. 한국영화산업에서 보기드믄 SF 영화를 완성시킨 성취는 분명 있지만, 이 영화가 대중의 취향이 흘러가는 방향까지 고려했다고 보기에는 다분히 마이너적이기 때문이다. 형민우 작가의 <프리스트> 같은 인기 콘텐츠가 할리우드가 아닌 국내에서 영화화되기 위해서는, 흥행에서도 가능성을 보여주는 토종 SF가 하나쯤 나와 줘야 하지 않나 싶다. 아, 목마르다.
2012년 4월 12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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