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영화 <부산행>과 <반도>의 좀비, 시리즈 <지옥>의 사신에 이어 연상호 감독이 A.I를 소재로 SF 장르의 포문을 새롭게 열어젖혔다. 뇌 복제를 다룬 로봇 액션 영화 <정이>는 故 강수연의 유작이라는 점과 크리에이터 연상호의 무궁한 가능성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작품이다.
쓸쓸한
해수면의 상승으로 황폐해진 지구, 인간은 달과 지구 사이에 쉘터를 마련하고 이주를 시작한다. 몇몇 쉘터에서 발생한 반란과 이에 맞선 인간 연합군의 교전 상태가 수십 년째 지속된 미래의 지구가 <정이>의 배경이다. 언뜻 로봇과 인간의 전쟁이 메인 테마인 듯하지만, 살짝 빌려올 뿐 영화는 뇌복제가 초래할 인간성 말살의 암울한 미래를 간결하고 강렬하게 묘사한다. 장르물 안에 철학적인 화두와 사유를 반짝반짝 녹여냈다. 희뿌연 지구의 풍경을 뒤로 공중 선로를 따라 운행하는 전철을 타고 이동하는 주인공 ‘서현’(강수연)의 쓸쓸한 뒷모습은 첨단과 황폐함이 뒤섞인 디스토피아 그 자체다.
해방의
영화의 스토리를 추동하는 근원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생명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본질적인 관계다. 반란군에 맞선 지구 연합군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용병 ‘윤정이’(김현주)와 작전 중 뇌사 상태에 빠진 그의 뇌를 복제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전투 A.I.를 만들려는 ‘윤서현’ 팀장. 아픈 딸을 위해서 전장에 나간 용병 엄마와 수십 년 후 엄마의 뇌를 복제하는 딸이라는 구도는 그 자체로 드라마틱함을 담보한다. 모성이라는 어떤 첨단의 과학으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지닌 뇌복제된 엄마와 이런 엄마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고 싶은 딸의 선택이 주의를 잡아둔다.
시니컬한
육안으로는 인간과 A.I 로봇의 구분이 어려운 시대다. 주기적인 테스트를 통해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미래에 육체란 과연 어떤 의미일지, 단지 뇌를 담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한 것일까. <정이>는 가격에 따라 의체(기계몸)의 등급이 나뉘고 이에 맞춰 ‘인간 대접’을 받는 고도의 물질만능주의 세상을 제시한다. 높은 가격을 지불한 A급 의체는 완벽하게 인간으로 대우받지만, 오히려 대가를 받는 C급 의체는 복제된 자기 뇌의 사용권을 회사나 기관에 넘겨야 한다. 얼마나 많이 복제되어 어느 곳에 활용될지, 뇌에 대한 권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뇌복제한 A.I 로봇을 마치 장난감처럼 활용하다 폐기한다. 전투용으로 개발되다가 트렌드가 바뀌거나 쓰임새가 사라지면 섹스 A.I 로봇이나 가정용 A.I 로봇으로 얼마든지 용도가 변경된다. 편안한 안식 조차 요원한 세상이다.
화끈한
<정이>는 오프닝과 엔딩을 화끈한 로봇 액션으로 장식한다. 한국영화에서는 처음으로 접하는 로봇 액션을 이질감 없이 구현해 양보다 질로 승부한다. 뭔가를 더하기보다 덜어내기를 선택한 감독의 연출력 역시 한층 노련해진 인상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 연 감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김현주는 이번에도 그 역량을 유감 없이 발휘한다. 슈트를 입고 소화한 강도 높은 로봇 액션과 더불어 감정과 표정 연기까지 시선을 모은다. 엄마보다 나이 들어 버린 딸로 분한 故 강수연의 절제된 연기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1월 20일(금) 공개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 D.P. >, <지옥> 등을 제작한 클라이맥스 스튜디오가 제작했다.
2023년 1월 12일 목요일 | 글 박은영 기자(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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