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제이라는 동물학자가 일천구백삼십팔 년부터 일천구백오십삼 년까지 물경 십오 년 동안 인간의 침실노동, 다시 말해 성생활에 대해 세계최초로 적나라하게 체계화시켜 내놓은 문서가 있었더랬다. 이를 가리켜 ‘킨제이 보고서’라고 하고, 마구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파격적 연구서는 역시나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뿌라스 마이너스 오차가 좀 있다손 치더라도 위 사항을 인정한다면, 호주에서 날아온 로맨틱 코미디 <베터 댄 섹스>, 21세기 판 킨제이 보고서라 명명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저렴한 예산으로 연출된 영화는 한 남녀의 화끈한 섹스를 위주로 침실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완곡하게 표현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아주 심하게 유쾌하고 발랄한 욕망에 솔직한 영화다.
언뜻 보면 <베터 댄 섹스>는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비교를 한다면 영화가 섭섭해할 정도로 이 발랄하기 그지없는 한 남녀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다름의 선을 명확히 긋고 있다. 운명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뻔한 결말에 도착하기 전, 깜찍하게 아옹다옹하며 사랑싸움을 하는 신도, 판타지 한 설정도, 뽀샤시 예쁘기만 한 그 어떤 이미지도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선사하지 않는다.
<베터 댄 섹스>는 이 같이 마냥 화사하기만 하고 실용성은 부재한 관습화된 장르의 옷을 과감하게 침대위에서 훌훌 벗어던져버린다. 그리고 지축을 울리며 요동치는 그들의 육체의 뒤섞임에 많은 부분을 영화는 할애하며 허무하기만한 상상이 아닌, 생활(침실) 밀착적인 이성의 연애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끈다. 뿐만 아니라, 신과 조시의 섹스는 이물스럽고 선정적으로 와 닿기보다 아이들이 장난치듯 천연덕스럽게 느껴지기에, 우리는 신나게 키득키득 거리며 박제화된 성의 의식에 대해 한번쯤 곱씹어보게 된다.
남녀의 관계는 지고지순하고 숭고함으로 똘똘 뭉친 정신적 사랑이 선(先)이요, 미천하기 짝이 없이 육체적 사랑은 그 후(後)라는 어릴 적 밥상머리 교육에서부터 잉태된 이 진리의 명제가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섹스와 사랑의 기묘한 동거 관계에 대해 되짚어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커플 남녀가 나란히 객석에 앉아 가장 밀폐되고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침실에 위치한 남녀의 행동양태를 보면서 동시에 또는 만인이 소박하게 웃을 수 있다는 점. 그리 쉽지 않음에도 <베터 댄 섹스>는 해낸다. 그러한 집단적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일단, 여성의 육체를 물신화 파편화시키며 탐했던 그간의 섹스를 다루었던 영화와 달리 당 작품의 카메라의 태도는, 몸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어느 한쪽 크게 치우침이 없이 마냥 부럽다는 듯 그냥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물론, 공개된 자리에서는 설레발을 떨며 손사래를 치일지언정, 사실은 모두가 가슴 한 구석에는 영화의 발칙한 내용에 겨드랑이 털이 훤히 보일 정도로 쌍수를 들고 “맞어! 맞어! 나도 저럴 땐 저런 생각했어!”와 유사한 내밀한 공감대를 품고 있기에 가능했기도 하다.
하지만 <베터 댄 섹스>에는 한 가지 못내 아쉬운 점이 있다. 맛난 음식도 자꾸 먹으면 물리듯, 영화는 시종일관 침대에서 뒹구는 그네들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초,중반의 참신한 맛을 떨어뜨리는 우를 범한다. 달리 말해, 영화의 이러한 자충수는 여자만 만났다하면 폭탄작위 수여식이 지체 없이 거행돼 속절없이 자립심 강한 이로 평가받는 필자와 같은 부류들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하튼, 낯선 곳에서 매혹적인 이성을 만났을 때 생성되는 심신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형상화시켜 그려낸 <베터 댄 섹스>는, 딱딱한 권위로 충만한 성교육물 시리즈보다, 감히 말하건대, 훨씬 낫다. 그렇다고 남녀의 이성관계를 진중하고 사려 깊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러한 사고방식이 팽배해지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가두고 억압하는 의도치 않은 기제로 역이용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남녀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에 둘러싸인 타인이나 환경이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자신에게 솔직하며 상대방을 배려, 건강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것이 암수간의 최고의 미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옹골찬 행위를 통해 서로가 교감을 느끼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성까지 자아나게 할 수 있는 추동력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침실노동권을 사수해야만 하는 우리로서는 필히 성취해야 할 덕목이자 쟁취해야 할 인간의 조건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