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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확실한 스타덤에 오르게 했던 <프리티 우먼>의 ‘비비안’으로부터, 그녀가 얼마나 달라진 히로인이 되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모나리자 스마일>. 그도 그럴 것이 <프리티 우먼>은 ‘여자의 야망은 오직 좋은 남자와 결혼함으로써만 이룩된다’는 식의 스토리를 정교하게 은폐하고 있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근사한 부호 ‘에드워드(리차드 기어)’가 내미는 빛나는 ‘유리구두’를 덥썩 신은 채, 매력적인 함박 웃음을 터뜨리는 ‘비비안’은 아무생각없이 동화되기엔 찝찝한 구석이 많은 캐릭터였다. 에드워드를 즐겁게 해 주고, 그가 말하는 대로, 혹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려는 그녀의 노력들은 예쁘고 섹시한 외양과 함께 맞물리며, 스크린 가득 물신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넘치도록 보여주었다.
그랬던 줄리아 로버츠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독자적인 파워를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여배우로 성장했고, 적어도 남성들의 시각적 쾌락에 단순하게 부응하는 멍청한 캐릭터로부터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세탁기 옆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정 주부나 거들을 입고 한껏 요염한 자태를 취하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CF를 보여주며, 분노어린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던 <모나리자 스마일>의 ‘캐서린 왓슨’. 이런 페미니스트를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지만(멋진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연예인이니 말이다), 여성 관객들의 입장으로서는 뭔가 뭉클한 감정이 유발되는 것이 사실이다.
<모나리자 스마일>의 태생은 다소 극적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로렌스 코너와 마크 로젠살은 우연히 들리게 된, 웰슬리 대학교 도서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1956년도 웰슬리 대학 연감에 꽂혀 있던 그 사진은 깔끔한 드레스를 입고 한손에는 책을, 다른 한손에는 후라이팬을 들고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었던 것. 그런데 제목이 걸작이었으니, ‘결혼이 최고의 학생을 만든다’는 문구였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뒷통수를 기분좋게 긁어준 그 사진은 <모나리자 스마일>의 줄거리로 무럭무럭 부풀어졌다. 뉴잉글랜드의 명문 웰슬리 여자 대학의 미술사 교수로 부임해온 ‘캐서린 왓슨(줄리아 로버츠)’. 그녀는 이 대학의 보수적인 기풍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에서 오게 된 것.
하지만 수재를 데려다 사회를 주도하는 여성 인력이 아닌, 세련된 ‘현모양처’로 키워내는 웰슬리 대학은 재단을 쥐고 흔드는 큰손 학부모들에게 학교 운영 전반을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학교 바깥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리섹스니 여권 신장 등 변화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 학교는 보이지 않는 투명막을 친 채 이를 단단히 방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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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흘러가는 이상 <죽은시인의 사회>만큼의 ‘감동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담담하게 영화를 끝맺는다. 예를 들어 캐서린이 대학원에 진학시키려고 애썼던 우등생 ‘조안(줄리안 스타일스)’은 갈등하는 듯 보여지다가 결국 결혼과 더불어 학업 연장을 포기한다. 그리고 나선 캐서린에게 주부로서의 여성을 너무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태도가 거북했다고 고백한다. 또 명문가 집안의 딸로, 정략적인 결혼을 했던 ‘베티(키어스틴 던스트)’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나서야, 결혼의 무미건조하고 쓰라린 이면을 맛본다. 그녀는 캐서린으로 인해, 전적으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났다기보다 스스로의 경험에서 비롯된 자각으로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이러한 결과들은 <모나리자 스마일>이 걸쳐있는 지점만큼이나 애매하다.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취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애초부터 현재 여성들에게도 유효한 문제들을 도발적으로 제기하는 식의 도전성은 담고 있지 않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학생들은 학교를 그만둔 캐서린을 아쉽게 송별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깨달았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를 생각하면 다분히 회의적이다.
거칠게 압축하면, ‘결혼 때문에 자신의 일과 자아를 포기하지 말자’는 모토가 깔려있지만, 이 철지난 여성 계몽은 어떠한 짜릿함도 관객들에게 선사하지 않는다. 또 조안이나 베티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성 문제를 둘러싼 이 영화의 적당한 해결의 제스처들은, ‘아무리 잘난 누군가가 설치더라도, 변할 사람은 변하고, 각자 갈길은 알아서 찾는다’는 음험한 시선이 깔린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
물론 이러한 반응은 너무 오버스러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통해, 현재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여권이 강하고, 활발한 페미니즘이 논의되고 있는 미국의 그 과거 모습을 일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의 여성들과 그러한 여성들을 대하는 남성들의 태도를 보며, 관객들은 현재 여성들이 처한 위치와 새로운 문제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로 <모나리자 스마일>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공격적인 페미니즘을 담고 있다고 예상했다면 오해를 푸시길. 마치 예쁜 액자 속에 담긴 과거의 사진을 보듯이, 이 영화는 귓가에 파고드는 감미로운 영화 음악을 들으면서, 따뜻한 캔커피를 홀짝일 수 있는 부담감없는 영화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