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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휴머니스트' 또는 '빈자리'
친구 | 2001년 5월 10일 목요일 | 서울대 교수(비교문학) - 고원 이메일

[친구]와 [휴머니스트]. 평범하면서도 좋은 제목이다. 일부러 튀게 만든 제목도 아니다. 각박한 세태와 무관한 듯 편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만만치 않은 제목이기도 하다. '친구'나 '휴머니스트'나 둘 다 남녀의 구별 없이 쓰이는 단어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자면 그것은 남성위주의 표현임이 드러난다. 그렇지 않아도 가부장 권력중심의 사회인데 좋은 제목의 영화까지 남자들이 독차지한다면 여자한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처녀들의 저녁식사]?

1. 친구

친구 그러고 보니 [친구]에 나오는 남자들 또한 노총각의 성격이 짙다. 준석은 여자와 같이 살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도 성격이 좀 특이하다. 그의 동거녀로 나오는 진숙도 따지고 보자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에서 문제되는 친구의 좁은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존재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인의 정서가 '감동적으로' 녹아든 화제의 영화 [친구]에 대한 시각을 좀 바꿔보기로 한다. 그리고 네 사람의 친구가 아닌 다섯 사람의 사건으로 이야기를 좀 넓혀놓고 보기로 한다.


진숙은 준석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에 그는 마약 중독자로 거의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그 위기를 벗어난다. 친구 두 녀석이 그를 찾아가는데 동수는 그 자리에 없다. 혹시 진숙이 동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택은 중호와 둘이서만 준석을 찾아간다. 중호는 준석이를 찾아가지만 상택은 진숙을 찾아간 것이다. 그 두 친구가 준석의 집에서 나와보니 골목에서 진숙이 상택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이 간다. 준석은 거의 폐인 신세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주인이다. 담요를 둘둘 말고 앉아서 큰소리를 지르고 있는 준석은 대가족의 구성원으로 보자면 늙고 병약한 할아버지에 해당한다. 영화에는 할아버지라는 존재도 빠져있다. 그런데 부친상을 당한 준석은 굴건상복을 입고 있다.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있을 때나 가능한 옷차림이 핵가족의 단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할아버지를 모르는 요즘의 세대에 초점을 맞춘 영화이다. 60년대의 영화인 [벤허]의 간판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준석이 폐인이 된 옆에는 여자가 앉아있다. 여자는 준석이가 그런 존재로 전락하는데 나쁜 영향을 준 여우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아픈 준석이를 옆에서 돌보아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라는 존재는 영화에서 처음에 딱 한번 나온다. 준석이의 어머니가 밥상을 들고 와서 아들과 남편과 함께 상머리에 같이 앉지만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밥상이나 들고 오는 사람이다.

영화관에서의 격투장면을 잠시 주목하자. 다른 학교 학생들의 단체관람에 친구 네 명이 끼어 들어 영화를 본다. 상택이 화장실에서 폭행을 당한다. 그리고 중호, 동수와 준석, 세 친구들이 그를 돕지만 싸움은 비화되어 친구 네 명이 다른 학교 학생들 전부와 싸우는 대 활극으로 뒤바뀐다. 이 폭행사건 때문에 준석과 동수는 퇴학당한다. 영화관의 화장실에서 벌어진 촌극이 주먹싸움으로 진행되었다가 겉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확대된다. 구름 떼같이 몰려드는 학생들은 현실이기보다는 악몽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오줌을 누고 있는데 적들이 그의 정체를 알아버리고 주먹을 휘두른다는 표면적인 이야기를 좀 각색하여, 상징적으로 거세당한 존재인 상택이 이 사실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꿈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의 우정을 다루는 영화가 사실은 남자 독신자들의 이야기이고 그 독신자들은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좌절한 인물들이라고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영화의 화자인 상택이라고 상정해 보자. 상택과 진숙 둘 만의 자리를 준석이 따로 마련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중호도 있는데 왜 하필 그가 영화의 화자로 등장하게 되는지 그 연유를 설명해준다. 여자와 단 둘이 대면한 상택은 서툴지만 통기타의 음악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사랑의 노래는 메아리 없는 하소연의 수준에서 끝나고 만다.

중호는 진숙과 준석의 동거 사실을 확인하려는 상택을 도와주는 인물이다. 상택은 중호와 함께 그 집에 간다. 골목에서 상택과 진숙이 만나는 순간에는 중호가 자리를 비운다. 그는 진숙이 골목에서 상택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 된 것이다. 영화의 화자가 객관적으로 사건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객관적인 자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등장인물을 자기의 관점에서 재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왜곡이다. 꿈의 왜곡을 뺨치는 솜씨라 할 수 있겠다. 동거관계에 있는 준석과 진숙의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비참하면서도 코믹한 상황을 보여준다. 감독의 연출은 이 점에서 매우 주도면밀하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시간에 선생의 지목을 두려워하여 책상을 왼쪽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며 눈치를 보던 중호는 <빈자리>를 찾는 상택의 분신이다. 영화관의 격투에서도 상택과 화장실에 같이 갔다가 상택이 얻어맞자 구원을 청하러 달려온 친구가 바로 중호였다. 상택이 찾는 <빈자리>는 그 성격이 과연 무엇일까?

2. 휴머니스트

영화의 화자는 그 이름이 태오이다. 태호로 들린 이름은 나중에 보면 마태오로 밝혀진다. 태오라는 이름은 좀 드문 이름이다. 태호/태오의 불확실한 관계는 뒤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태오는 자기의 가족을 소개하면서 성당이라는 공간을 활용한다. 아버지, 계모 (후/머니) 그리고 이복 남동생이 그의 가족이고 그들은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석한다. 주인공의 참석 동기는 불순하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직 군인으로서 떼돈을 번 가장의 가족 말고도 그밖에 수녀와 거지가 성당이라는 공간을 빌려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 소개의 장소로 굳이 성당이 활용되고 있는 까닭은 사실은 수녀 때문인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함께 끼어 소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수녀가 보여준다. 예쁜 수녀의 다문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전라도 벌교의 말투는 상상을 초월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게다가 태오의 동생의 입에서도 예상치 못한 전라도 사투리가 삐져 나온다.

영화의 초점은 아버지의 납치극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무모한 짓을 맡은 하수인두 명이 영화의 조연을 맡고 있다. 이들은 태오가 초등학교 시절에 사귄 친구들로서 고아원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이름은 특이하게도 아메바와 유글레나이다. 아메바는 생물체의 명칭인가 하면 기독교를 상징하는 표현인 <아멘>과도 통한다. 마태오가 가톨릭 교도의 본명이듯이, 유글레나라는 이름은 가톨릭의 본명을 풍자적으로 새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어원을 알기 어려운 이런 본명은 예쁜 수녀의 전라도 사투리를 떠올린다면 바로 그 수녀의 본명일지도 모른다. 그 낯선 이름이 오히려 여자의 이름으로 더 알맞게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레나는 화자의 설명에 따르자면 소년시절에 개한테 불알을 물려 고자가 된 인물이다.

영화의 시작 크레디트에 떠오른 제목 [휴머니스트]를 보면 <머니>가 따로 읽힐 수 있도록 음절이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자破字에 해당되는 <머니>에서 바로 연상되는 단어는 <돈>이다. 5억원의 돈을 챙기기 위해 아버지를 납치하겠다는 것이 태오의 계획이니 말이다. 태오 일당은 썩어가고 있는 돈을 챙긴다는 의미에서 모두 '휴머니스트'들이다. 거지한테 수표를 던지는 태오의 눈에 푼돈은 <휴지>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도 휴머니스트다. 여자의 몸을 갖고 노는 데 있어서는 그도 돈을 휴지처럼 내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휴머니스트'다. 아들이 돈 때문에 아버지를 납치할 경우, 사정에 따라서는 아버지의 살해도 예상해야된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는 납치조차 당하지 않게 되니 관객은 <휴>하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 쉴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가능한 연상은 <어머니>이다. 태오 일당은 모두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이다. 단성생식의 대명사인 아메바는 아예 어머니가 필요 없는 존재이다. 아버지가 납치 당하지 않는 대신에 두 남녀가 납치 당한다. 남자는 계모의 정부이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고 아버지처럼 복장을 차리고 그 집에 왔다가 그는 뜻밖에 봉변을 당하고 만다. 게다가 트럭에 받혀 승용차의 트렁크가 크게 망가지면서 그는 그만 죽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을 꿈꾸는 아들의 꿈이 현실 밖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납치 당하는 여자는 예쁜 수녀이다. 그녀는 납치의 현장에 우연히 나타난다. 그리고 함께 끌려간다. 중산층의 속물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문맥도 없이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그녀의 상징성은 <고향>이다. 그것은 그녀의 원장 수녀님 또한 똑 같은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점 때문에 더욱 확고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모의 아들이 선생님의 말투를 물려받아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사투리를 통해 비어있는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간다. 젊은 몸을 빌려 비어있는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간 계모 (후/머니)와 나란히/다르게 그녀 또한 비어있는 어머니의 자리에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수녀는 '휴머니스트'이다. 그 <어머니>를 유글레나는 죽이려하고 아메바는 강간하려 든다. 그리고 마태오는 살려준다. 그들에게 문제는 <썩어가고 있는 돈(휴/머니)>이 아니라 <어/머니>인 셈이다. 그녀를 중심으로 행동의 축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수녀首女이다. 어머니가 수녀인 세상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수남/가부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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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6e2k
잘읽엇어여~   
2010-01-31 03:13
mckkw
내는 니 시다바리가?   
2009-06-29 20:29
ejin4rang
친구멋있었다   
2008-10-17 08:42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49
ldk209
친구?? 결국 배신...   
2007-01-2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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