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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기억하라!
진저 스냅 | 2001년 5월 16일 수요일 | 모니터 2기 기자 - 박우진 이메일

진저 스냅 [진저 스냅 ginger snaps], Ginger는 여주인공 이름이고, snap은 낚아채다. 진저가 낚아챈다? 이 뜻이 맞나? 영화를 보는 내내 못견디게 궁금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서둘러 사전을 뒤져보니, snap은 동사로 '덥썩 물다, 낚아 채다'란다. 음, 진저가 덥썩 물다. 이게 영화 제목이었구나. 그렇지, 진저가 늑대 인간으로 변해서 개와 사람을 덥썩 덥썩 물고 다니니까 말이 되지. 그런데 사전을 쭉 따라 내려가다 보니, 재미있는 뜻이 몇 개 더 있었다. ginger snaps: 생강과자. 또한 ginger는 생강이라는 뜻 이외에 '오렌지 빛을 띤 갈색의'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이 것을 snap의 '스냅사진' 의미와 연결시키면, '오렌지 빛을 띤 갈색의 스냅사진'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된다. 오렌지 빛을 띤 갈색은 혹시 핏빛?

그저 공포영화로만 알고 본 영화였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늑대 인간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서양 괴물의 전형인데다, 영화는 피비린내나는 잔인한 장면만 군데군데 삽입해 놓았을 뿐 숨을 조여오는 압박감, 간 떨어지게 깜짝 놀래키는 긴장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석에는 큰 비명의 파도가 한번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에이 이게 뭐야, 시시해' 라고 투덜거리며 3류 호러물로 치부해버리기엔 아직 이르다. <진저 스냅>에는 마치 그 제목처럼 숨겨진 뜻이 배부르게 있었으니.

우선 늑대 인간의 특징은, 평소에는 인간이다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늑대로 변신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늑대 인간은 왜 보름달에 환장할까. [진저 스냅]에서는 그 해답을 달의 '여성성'에서 찾고 있다. 달은 예로부터 여성에 비유되어 왔다. 동양에서는 남성은 양, 여성은 음이라고 하여 전자는 태양과 낮, 후자는 달과 밤에 연결시켰고, 한국 민속에서도 딸에게 달을 바라보게 하여 그 정기를 들이마시게 하는 풍습이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달의 신 셀레네 또한 여성이다. 달의 변화 주기는 약 28일로 여성의 월경주기와 일치하며 그 변화하는 모습이 임신한 여성의 배와 같다. 보름달은 만삭이 된 여성의 배, 즉 생명 탄생 직전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래서 늑대 인간은 보름달을 보며 인간에서 늑대로 거듭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래서인지 영화는 늑대인간을 여성으로, 진저(캐서린 이자벨)가 늑대인간에게 물리는 것도 초경이 시작되는 날로 설정해 두고 있다. 여성 늑대 인간은 위의 언급을 제외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여성은 사회적 약자로 기득권에서 밀려난 존재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 진저는 동생 브리짓(에밀리 퍼킨스)을 제외하면 친구도 없고, '삶은 우리의 적이다'를 외치며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만큼 기존의 삶에 반하는 인물이 아니던가. 즉, 진저가 드러내는 야수성은 지금까지 억눌려 왔던 여성(혹은, 사회적 약자들)이 표출하는 분노인 것이다. 그것은 진저가 죽인 사람들이 모두 진저와 브리짓을 괴롭힌(?) 전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성의 복수는 남성에게 월경을 옮겨놓는 형태로 진행된다. 진저가 늑대인간이 된 후 처음으로 성교를 하는 남자아이는 성기에서 피를 흘리는, 마치 여성의 월경과도 같은 증상을 겪는다. 이러한 설정은 여성의 저항으로 이루어진 남성에 대한 처벌이 성 역할의 전이로 나타났음을 뜻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왠지 씁쓸하지만) "너도 여자 입장이 되어 봐." 이거다.

'16살이 되기 전에 죽지 않으면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로 맺어진 진저와 브리짓 자매의 기묘한 관계는, 그녀들을 한 사람에게 내재된 두 자아로 해석하게 하기도 한다. 진저와 브리짓은 둘만의 세계를 만들고, 거울 보듯 서로를 바라본다. 이러한 유별나게 일치된 관계는 늑대 인간으로 변해 이성을 잃은 진저마저도, 브리짓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 종반 산산히 깨어지는 두 사람의 사진은 그녀들의 균열을 예고하고 이 불길한 복선은 결국 브리짓이 진저를 죽이는 결말로 실현된다. 그렇다면 왜 브리짓은 진저를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 또다시 모순된 현실로 진저를 돌려놓기에는 그녀가 이미, 아주 작은 충동에도 분노를 폭발시키는 극단적으로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브리짓은 진저에게 오히려 현실과 격리되어 평화로운 죽음을 주고 싶었으리라. 진저에 대한 브리짓의 애정과 배려는 브리짓이 사그라지는 진저의 마지막 숨결을 함께 나누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진저 스냅]은 성장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적응함으로써 어른이 된다. 그 도중에 겪게 되는 두 자아의 갈등. 보다 강하고, 욕망과 분노를 자제할 줄 아는, 사회화된 자아가 승리하는 과정.

진저와 브리짓은 영화 초반, 끔찍한 죽음의 이미지를 사진에 담아낸다. 삶을 적으로 규정하며 죽음을 꿈꾸는 이들. 사진으로 남긴다는 것은,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함이다. 진저와 브리짓은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구체적인 사진을 통해 또렷하게 형상화함으로써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음과 마주치도록 만든다. 죽음을 기억하고 되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삶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다. 이 명제는 자칫 모순으로 비친다. 그러나 조금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누군가가 자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나누고, 화자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히 살고 싶어'의 강화된 반어법으로 풀이된다. 또한 사진이란, 삶의 단면인 동시에, 삶을 왜곡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살아있는 진저가 사진 속에서는 감쪽같이 죽은 것처럼. 즉, 그녀들이 찍어낸 사진은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핏빛 사진'들의 의미는 일그러진 현실을 죽음으로써 벗어나,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이 아닐까.

그래서 진저의 임종 때 사진을 찬찬히 훑어 내리는 장면은 진저와 브리짓의 삶을 반추하는 동시에 진저의 죽음을 단지 한 괴물의 정당한 죽음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 보이게 한다. 누가 그녀를 괴물로 만들었을까, 서글픈 반성을 던지며.

[진저 스냅]은 단순한 공포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은 이유는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도를 시도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성공적인 공포영화 또한 분명 아니다. 섬뜩한 굴곡이 없는 밋밋한 구성은 캐서린 이자벨의 섹시한 캐릭터에 질질 끌려다니고, 영화는 관객의 심리를 파고드는 섬세하고 치밀한 효과 없이 피범벅된 화면만으로 승부하려 하는 서툰 면모를 보인다. 또한 늑대인간의 복수라는 결과만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각성해야할 그 원인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렸으며, 인물들의 행동은 개인적 의미에 머물러, 사회적인 주제의식에 매끄럽게 연결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독은 문제의식이 뚜렷하고, 독특한 공포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거창한 욕심을 품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두 마리 토끼 모두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다.

뒤를 돌아보라, 당신이 어제 음흉한 추파를 던졌던 섹시한 여성의 척추에서 스물스물 꼬리가 돋아나고 있을 지도 모르니.

2 )
ejin4rang
죽음을 기억하겠다   
2008-10-17 08:42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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