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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외면한 수작
리플리 | 2000년 3월 25일 토요일 | 오상환 기자 이메일

내가 아닌 타인과 동일시를 꿈꾸는 자의 이야기는 닿을 수 없는 슬픔에 대한 처연함과 자기 연민 사이의 부조화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이 진한 여운을 남긴다. 끝없이 비상하려는 자의 고독한 탈출기는 끝이 예정된 상황을 동반하는 것이기에, 어두움을 안고 살아가는 자의 이야기는 지극히 폐쇄적인 고독과 어두운 내면으로부터 기인하는 심리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다.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한 발짝 퇴행한 듯한 이러한 이야기가 더욱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인간의 내면 깊이 자리잡고 있는 비애와 유쾌함을 동시에 마주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력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악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인간적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알랭 들롱의 처연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던 [태양은 가득히]역시 욕망과 자기 연민 사이의 굴레를 질주하는 자의 어두움으로 점철된 이야기가 스산한 긴장과 매력을 선사하며 수많은 영화팬들의 가슴을 사로잡을만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자조 섞인 비애와 양심을 버릴만한 대담함으로 무장한 알랭 들롱의 싸늘한 미소는 극단적 자기 파괴를 겪는 자의 비애를 예고한 것이기에, 관객들은 악의 사슬에 가까이 다가가는 인물을 보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화가 아직도 많은 영화팬들에게 회되는 이유는 비단 알랭 들롱의 씨니컬한 매력 때문이 아니라, 어두운 심리를 관찰하는 날카로움 덕분일 것이다.

[태양은 가득히]가 발표된지 40년이 지난 지금 신분 상승을 향한 욕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부활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가슴 시린 사랑 이야기를 우아하게 그려내는 솜씨를 선보였던 안소니 밍겔라 감독에 의해 재창조된 새 천년의 [태양은 가득히]는 알랭 들롱보다 더욱 나약하고 볼품없는 '인간' 리플리와의 만남을 선사한다. 알랭 들롱을 대신할 새로운 페르소나는 [굿 윌 헌팅]을 통해 지성파 연기자로 떠오른 맷 데이먼이다. 알랭 들롱의 건장함과 넘치는 남성미 대신 연약함과 지성미, 순수함을 동시에 갖춘 맷 데이먼으로 인해 '리플리'는 [태양은 가득히]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매우 섬세하고 부드럽게 욕망을 쫓는 자의 비극적 행로를 엮어낸다.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는 패트리샤 하이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를 영화화 것으로,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어떻게 각기 다른 해석을 부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리플리]는 [태양은 가득히]에 비해 인물들의 감정선을 밀도있게 포착하며 주요한 사건에 이르는 굴곡과 감정의 변화를 미세하게 관찰한다. 50년대 메소드 배우들로 돌아간 듯한 90년대의 배우들이 빚어내는 앙상블과 더불어 영화의 품격을 더하는 음악으로 수놓은 [리플리]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문법과 저예산 영화의 감수성이 함께 어우러진 보기 드문 수작이다. 아카데미를 석권했던 안소니 밍겔라의 최고작임이 분명한 이 작품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의 주요부문에서 노미네이트 되지 않은 것은 분명 의외임에 틀림없다.

[리플리]의 재능Ⅰ -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능력

[태양은 가득히]가 계급갈등에 대한 조소와 신분상승을 향해 질주하는 자의 악마적 속성을 파고든 반면, [리플리]는 어두운 내면 속성을 화면 위에 펼치는데 주력한다. 초라한 현실을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우연히 상류 사회로의 진입에 성공한 리플리(맷 데이먼)는 열성적으로 디키(쥬드 로)에게 집착한다.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소유한 자에 대한 동경에서 그치지 않고, 디키와 동일시되기를 원하는 리플리의 욕망은 점점 황폐함의 끝을 마주하도록 이끈다.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부풀려진 욕망과 거짓으로 점철된 삶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성공을 쫓아보려는 '리플리'의 분열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한다. 리플리는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들롱과는 달리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만으로 점철되어 있지 않다. 디키를 숭배하고 그를 닮아 가는 리플리의 악마적 재능은 디키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알랭 들롱과는 달리 리플리는 사건을 주도면밀하게 계산하고, 풀어나가는 치밀함을 품고 있지 못하다.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당황해 하면서 처리하기에 급급한 나약한 청년일 뿐이다. 치밀하고 민첩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닌, 예민하고 순진한 청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성공을 향한 질주가 부를 얻기 위한 속임수라기보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시험대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비단 [태양은 가득히]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리플리]가 이처럼 인물의 다중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은 원작과의 간격을 더욱 넓히며 이야기에 새로운 흐름을 불어넣는다. 관객들은 '악마적 재능'을 갖춘 리플리를 보면서 재능 뒤에 숨은 처연함과 쓸쓸함의 깊이를 목격하게 된다. 대개 스릴러 영화들이 간과하고 있는 인물의 감정선이 생동감있게 영화의 흐름 위에 자연스레 펼쳐진다. 이러한 깊이는 스릴러 구조에 다양한 인물이 빚어내는 긴장을 덧입히고, 드라마가 자유롭게 살아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마치 잘 짜여진 연극을 보는 듯 인물들의 감정이 살아있는 것도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열린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영화 [리플리]의 재능 Ⅱ - 비밀스러운 인물들

점점 자기 분열에 치닫는 리플리 외에 영화 [리플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은 한마디로 정형화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특히 디키 역을 연기한 쥬드 로는 이 영화의 발군이다. 쥬드 로의 비열하고 나른한 카리스마가 영화를 압도하는 힘마저 보여준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유분방한 디키 역시 리플리와 마찬가지로 묘한 매력과 은밀한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리플리와 디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는 관객들로 하여금 나른한 긴장을 선사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덧입힌다.

디키와 리플리의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인물들 역시 뚜렷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디키를 비극의 늪에 빠뜨리는 리플리를 증오하는 마지(기네스 팰트로우)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리플리 또는 디키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생동감을 부여받는 캐릭터로,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 대한 가공된 캐릭터이다. [태양은 가득히]에서의 그녀가 단순히 디키의 애인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리플리]에서의 마지는 리플리와 디키 사이를 포장하는 속임수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안소니 밍겔라 감독은 끝내 두 남자 사이의 운명을 눈치채지 못하는 그녀를 통해 이야기의 층을 한층 확장시킨다.

케이트 블랑쉬가 연기한 메리디스는 매우 안정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리플리의 내면에 혼란을 끼얹고, 이야기의 흐름을 가공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한다. 마지와 메리디스 모두 사건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한 채 주위를 배회하는 인물들이지만, 전통적인 여성 캐릭터에서 벗어나, 영화에 묘한 운율을 제공하는 가공된 캐릭터라는 점에서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캐릭터가 가공적인 것은 캐릭터를 통해서 사건을 묘사하고, 적당히 속임수로서 활용하는 역할로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캐릭터는 영화의 중심에 있어야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묘한 긴장과 비밀스러움을 제공하기 위해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기네스 팰트로우와 케이트 블랑쉬의 고혹적인 매력과 우아함도 이러한 매력에 큰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영화 [리플리]의 재능 Ⅲ - 미묘한 사랑의 형태

[리플리]가 무엇보다 관객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태양은 가득히]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두 주인공의 사랑 때문이다.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들롱이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 이외에 어떤 인간적인 감수성도 보이지 않을만큼 매우 냉철하고 주도면밀한 모습을 선보였던 것에 비해 [리플리]의 리플리는 신분상승에 대한 욕구보다는 디키에 대한 동경을 가슴에 가득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디키에 대한 동경은 사랑으로 발전하는데, 디키와 리플리 사이에 흐르는 묘한 동성애적 코드는 관객으로 하여금 숨죽인 긴장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이러한 사랑은 리플리가 동성애자라기 보다는, 디키에 대한 동경이 사랑으로 발전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리플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면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디키와 리플리 사이의 알 수 없는 힘의 기류를 설명하는 해답이 되기도 하는 이러한 설정은 다층적 해석의 여지를 가능하게 만드는 열린 구조의 매력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도식적인 설정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느낌의 이야기 구조를 마주할 수 있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영화 [리플리]의 재능 Ⅳ - 빛과 공간에 대한 주목

사막의 풍광을 빼어나게 담아내며 어른들의 사랑이야기를 원숙하게 담아낸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제작팀이 다시 호흡을 맞춘 만큼 [리플리]는 아름다운 공간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마술적 힘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로마, 나폴리, 베니스 등 이태리의 여러 도시들의 풍경은 낭만적이고 격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촬영 감독 존 씰은 풍경의 아름다움을 기품있게 담아낼 줄 아는 보기 드문 능력을 지녔다. 이 영화에서의 촬영은 단지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어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공간의 깊이가 인물들의 감정 이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영화의 흐름에 격조를 더한다.

영화 [리플리]의 재능 Ⅴ - 인물들의 감정을 설명하는 음악의 향연

[베티 블루], [연인],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이어지는 가브리엘 야레의 영화 음악은 단순한 배경 음악으로서 그치지 않고, 영화의 내러티브까지 대체할 정도의 아름다운 선율로 수많은 팬들을 사로잡아왔다. 신비스러움과 우수가 묻어나는 그의 음악이 또 한번 장기를 발휘한 영화가 [리플리]이다. [리플리]에서 그의 음악은 리플리와 디키 사이의 출렁이는 감정의 물결을 그려낸다. 재즈와 클래식의 향연으로 무장한 이 영화의 음악은 단순한 배경 음악 차원을 넘어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디키와 리플리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역할마저 담당한다. 서로 이질적일 수 있는 재즈와 클래식이 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즉흥성과 우아함이라는 음악적 특성을 리플리와 디키의 모습에 비유하여 인물들이 가 닿는 행로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단순한 컴필레이션의 기능을 훌쩍 뛰어 넘는 [리플리]의 음악들이 더욱 아름다운 것도 이런 이유 덕분이다. 맷 데이먼이 직접 부르는 ‘My Funny Valentine’은 쳇 베이커의 여린 감수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만든다. 쳇 베이커, 마일즈 데이비스, 찰리 파커, 빙 크로스비의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꿈에 젖을 수 있다. 몽환적 분위기 가득한 재즈와 클래식의 향연에 심취할 수 있는 반가운 기회를 제공하는 [리플리]의 영화 음악은 단연 올해의 베스트 셀렉션이 분명하다.

6 )
ldk209
태양은 영원히의 조금 비꼰 버전....   
2009-04-17 00:13
hakus97
난 그저그렇게 극장에서 보았던 기억....   
2009-03-05 21:26
ejin4rang
대작이네요   
2008-12-02 14:48
ljs9466
기대되는 영화!!   
2008-01-14 15:14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3:43
ldk209
태양은 가득히... 그 눈빛 잊을 수 없어....   
2007-01-2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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