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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심형래와 아버지
어바웃 슈미트 | 2003년 3월 5일 수요일 | 서대원 이메일

상당히 주관적인 시선일지는 몰라도 <어바웃 슈미트>를 보는 내내 두 명의 인물이 뒤서거니 앞서거니 머릿속에서 숨바꼭질을 벌이며 맴돌았다. 그들은 다름 아닌 심형래와 아버지.

슈미트(잭 니콜슨)의 게슴츠레 뜬 눈, 안면의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연동하는 굴곡 깊은 눈썹과 주름, 어기적어기적 거리며 땅에 끌려가듯 걷는 모습, 심드렁한 표정 등 정말이지 서민들 내에서도 소위 ‘밥’이 되는 심형래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짐짓 근엄하고 유쾌한 듯 보이는 쇠락한 육신의 껍질 속에 포화 상태에 이른 쓸쓸함과 추레함에 대한 연민의 정은 바로 우리들 아버지의 자화상과 그대로 포개진다.

그만큼 <어바웃 슈미트>는 위의 두 인물이 그러하듯 거부하기 힘든, 하지만 불편함이 깃든 친근함의 정서가 오롯이 담긴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폭적으로 우리의 감정선을 자극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물거나 다소 생경하게 와 닿는 이유는 <어바웃 슈미트>가 한국영화가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라는 점이다. 기존의 같은 땅에서 태어난 번드르르한 녀석들의 외관과는 아주 상이한.

인생의 반 이상을 회사에 전념해온 슈미트는 성대한 송별회와 함께 정년퇴직을 하게 된다. 물론, 모양새는 그러하지만 기실 전도유망한 젊은 후배들에 떠밀려 밖으로 내몰리는 밧데리 다 된 고철에 다름 아닐 터. 이렇듯 인생의 막장에 다다른 슈미트는 나름대로의 제 2의 삶을 일구기 위해 이것저것 기웃거려 보지만 되는 일은 없고, 설상가상으로 한 평생 마음을 같이 한 반려자였던 동시에 지긋지긋한 할망구였던 부인이 갑작스럽게 비명을 달리함으로써 더더욱 힘든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TV를 보고 탄자니아의 어린이 엔두구를 후원하게 된 슈미트는 그나마 그에게 편지를 부치는 소일거리를 통해 삶의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일점혈육인 딸의 마뜩치 않은 결혼을 무산시키는 것이 마치 생애 마지막 남은 사명인 양 절치부심하며 그녀가 살고 있는 덴버까지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행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급기야는 딸과의 대면을 겪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상당히 초라하고 미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리즈 위더스푼이 일약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된 <일렉션>으로 미국 사회의 치부를 건드렸던 알렉산더 페인의 <어바웃 슈미트>는 무난하게만 보이는 미국 중산층의 이면에 깔린 가치관을 담담하게 내비췬다. 동시에 페인은 슈미트라는 늙수그레한 인물을 통해 소신껏 열심히 살아왔던 인생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이 얼마만큼이나 허망하고 비루한 것인지 코미디를 수단으로 삼아 보여준다. 대신, 영화의 코미디는 상당히 건조하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기름기 좔좔 흐르는 환호작약(歡呼雀躍)성 웃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영화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페인이 주조해낸 웃음의 울림은 더 없이 어울린다.

언뜻, 영화는 황혼기에 길을 나서는 한 노인의 여정을 담은 데이빗 린치의 <스트레이트 스토리>와 일상적 생활 속에 도사리고 있는 비극적 상황에 대해 묘파했던 커티스 헨슨의 <원더 보이즈>를 합해 놓은 듯하다. 하지만 <어바웃 슈미트>는 린치의 영화처럼 관조적으로만 인물을 다루지 않고, <원더 보이즈>처럼 인물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가볍게만 터치하진 않는다. 결국, 슈미트라는 심술 가득해 보이는 퇴직자가 매 순간마다의 너절함과 처연함을 능청스러운 코미디로 잘 엮어 전달해준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슈미트가 처해 있는 난처한 상황을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 보여 주지는 않되, 한 없이 비극적으로 신파적인 복 받침의 서러움으로 다룰 수 있는 영화를 코믹함으로 승화시켜 이끌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슈미트의 예기치 못한 말년의 추락의 비애가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이다. 평범한 삶의 아득한 비극을 묘파하는 데 있어 코미디라는 장르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는 경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오래 전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때문에 위에서 얘기했듯 코미디언인 심형래의 몸짓 표정과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려 진 것이다.

슈미트는 결국, 유일하게 자신의 진솔한 속내를 드러냈던 엔두구의 답장을 보고 오열을 터트린다. 가슴이 후끈해지는 그 장면은 더 이상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족 앞에서 끝간 데 없이 박살나며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처량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우리들 아버지의 뒷모습과 맞닿아 있다.

그러기에 영화는 보는 이들의 망막과 가슴에 불편하고 아련한 잔상을 명징하게 새겨 넣는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내키지는 않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인생의 끝자락에 내몰린 내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러한 세상의 이치에 자신 역시 당도할 수밖에 없는 세월의 속절없음에 포박당한 심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1 )
ejin4rang
그런대로 재미있네요   
2008-10-1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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