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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의 데뷔작이다!
파이 | 2003년 9월 20일 토요일 | 유령 이메일

불공평하게도 세상에는 천재를 타고나는 작가들이 있다. 모차르트가 될 수 없는 살리에리들을 울게 만드는. 오손 웰즈 같은 사람은 서른도 되기 전에 <시민 케인>을 만들었다. <시민 케인>을 낮게 평가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 영화가 후대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다. 타고난 천재인지, 아니면 '노력의 천재'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으로부터 거장이라는 칭호를 얻은 작가들도 있다. 오손 웰즈처럼 데뷔작이 그대로 대표작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고, 여러 편의 작품을 만든 후에야 사람들의 뇌리에 콱 박히는 작품을 남기곤 한다. 그러고 보면 데뷔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거장들의 초기작에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10년 전만 해도 영화를 접할 수 있는 통로와 정보량은 지금보다 훨씬 좁고 적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듀얼>(Dual, 1971)이나 존 카펜터의 <분노의 13번가>(Assault on Precinct 13, 1976)를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기술이 발달하고 세계가 서로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영화를 보는 시야를 훨씬 넓고 다양하게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당신의 눈 아래 있는 것이다. 재능있는 작가, 거칠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작가,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이 주목하지 않는 젊은 작가를 발견하고 그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당신, 그는 당신의 것이다. 지금 이 글이 주목하는 작가는 1969년 2월 12일 브룩클린에서 태어난(대학생처럼 굳이 학번을 따지자면 80년대 말 학번쯤 되겠다), 어릴 적에는 고전 영화와 그래피티 아트에 심취했다는 미국인 작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레퀴엠>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찾으면 두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에르베 레노 감독의 프랑스 액션물인 <레퀴엠>이요, 다른 하나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레퀴엠>이다. 2001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개막작으로 국내에 공개된 <레퀴엠>을 보신 분들은, 모르긴 몰라도 영혼과 육체가 갈라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레퀴엠>은 마지막 1초까지 끝없는 이미지의 세례를 보여주며 환각과 악몽, 무저갱에 떨어진 인간들의 비참한 운명과 덧없는 꿈을 그리고 있었다. <레퀴엠>을 통해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우리나라에서도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지만, <레퀴엠> 이전에 이미 <파이(Pi)>가 있었다. 친구와 가족을 통해 모은 돈 6만 달러로 28일간 촬영한 <파이>를 통해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과 전미 박스오피스 35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얻었던 것이다.

국내에서 <파이>는 <레퀴엠>과 함께 개봉했는데, 별 반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변변한 스타 한명 등장하지 않는 흑백... 수학영화. 영화를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탐구심 왕성한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영화를 보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자 하는 관객들에겐 적합하지 않은 영화. 그렇지 않은가?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지만, <파이>는 소위 말하는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여점에서 쉽게 찾기도 어렵고 재미도 없는 <파이>를 주목하는 까닭은, 이 영화가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첫 장편 데뷔작이자, 비록 상업적이지는 않지만 빛나는 가능성과 상상력을 가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맥스는 322 곱하기 491, 73 나누기 21 따위를 앉은 자리에서 계산해내는 수학의 천재이지만 심한 두통과 환청, 약물 중독과 환각에 시달리는 대인기피증 환자다. 그의 이론은 세 가지. 1. 수학은 자연의 언어이다. 2. 모든 것은 숫자로 표현된다. 3. 어떤 체제에도 공식이 있다. 또는 숫자엔 반드시 규칙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자연은 공식을 가지고 있으며 근거가 되는 것은 전염병 확산 주기와 카리브해 인구 증감. 태양의 흑점 주기, 나일강의 범람 등. 맥스는 주식 시장도 숫자로 표현되는 만큼 규칙을 갖고 있다고 믿고 이 규칙을 찾으려 한다. 우주를 지배하는 규칙을 찾으려는 맥스의 노력과는 달리, 40년간 파이의 규칙을 연구했던 그의 스승 솔은 모든 것의 근원은 혼란과 복잡성이라고 맥스의 이론을 부정한다.

그런 맥스 앞에 유대교 신비주의인 하디시즘을 신봉하는 토라(유대교 경전) 수학 연구자 레니가 나타난다. 레니는 토라를 움직이는 원리인 216자리 숫자를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216자리 숫자를 발견한 맥스는 그 숫자가 레니가 찾고있는 것이며 스승이 발견했지만 은폐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란셋 퍼시 증권사와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이 그가 발견한 숫자를 노린다.

파이와 얼핏 비교할 수 있는 영화는 같은 수학자를 다룬 론 하워드 감독의 <뷰티풀 마인드>이다. 물론 <파이>는 픽션이며 <뷰티풀 마인드>는 윤색을 가하긴 했으나 실제 인물의 이야기이다. 두 인물은 똑같이 위대한 발견을 하고(내쉬에게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내쉬 이론과 216자리 숫자)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린다(내쉬는 정신분열증, 맥스는 약물 중독). 하지만 <파이>는 맥스의 인간승리 따위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비록 에드 해리스, 러셀 크로우, 제니퍼 코넬리 같이 쟁쟁한 배우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파이>는 몽환적이고 현란하다. <파이>에는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레퀴엠>의 분위기와 이미지가 배어있으며 피보나치 수열과 토라 문자와 수의 연관성, 아르키메데스 이야기, 황금비 등 수학사와 공식에 연관된 이야기들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흥미를 끈다. <파이>를 보다 보면 세상과 수에 얽힌 비밀을 직접 풀어보고 싶어질 정도다. <뷰티풀 마인드>가 인간승리담이라면 <파이>는 수학 미스테리물이다.

세상의 근원에 숫자가 있었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처럼 맥스는 숫자야말로 모든 자연 법칙의 근원이자 얼핏 불규칙해보이는 현상들, 커피에 프림을 넣었을 때 풀어지는 모양이나 소라 고동의 나선형 같은 것들도 통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발견하는 것은 인간의 진리에의 열망을 둘러싼 다양한 욕망들, 그것의 사악함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성과 속을 대표하는 두 집단, 즉 증권사와 신비주의 집단이 맥스를 위협하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성과 속은 중세를 넘어 근대까지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온 두 축이자, 인간 활동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파이는 (이 책은 무척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쓴 <푸코의 진자>같은 허망함을 보여주고 있으나 결론은 모호하면서도 희망적이다. 과연 그는 살아 있는가, 아니면 살아있다는 환상인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한때 <배트맨 5>의 감독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지금 그 자리는 <메멘토>의 크리스토퍼 놀란이 차지하고 있다. 크리스찬 베일이 배트맨 역으로 내정되어 있는 반면 아직 캐스팅도 확정되어 있지 않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차기작은 바로 <아들을 동반한 검객>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네 비디오 출시 제목이며, 일본 식으로 하자면 <아이 딸린 늑대>쯤 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만들 영화의 영어 제목도 이고. 이 영화 아시는 분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유모차에 아들을 싣고 다니는 방랑 무사 이야기. 1972년 작이니 꽤 오래된 영화다. 원작은 고이케 가즈오의 성인 액션 만화.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이 사무라이물을 어떻게 영화화할지 자못 궁금하다. 제니퍼 코넬리는 물론 나오지 않겠지... 기모노를 입고 검을 휘두를지도 모를 제니퍼 코넬리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1 )
ejin4rang
황당하네요   
2008-10-16 09:4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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