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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가식적 도덕, 개인의 진실을 잠식하다 | 2004년 3월 4일 목요일 | 임지은 기자 이메일


저명한 고전문학 교수 콜먼 실크(안소니 홉킨스)는 강의 중 무심코 사용한 한 마디 단어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사건인즉슨 상습적으로 결석하는 학생들을 향해 "이 학생들은 뭔가? 유령(spooks)이기라도 한 건가?"라고 일갈했던 것인데, 실은 spook라는 말에는 흑인을 비하하는 의미가 숨어있었던 것. 공교롭게도 문제의 학생이 정말 흑인이었던 터라, 콜먼은 졸지에 악질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아내는 죽음에까지 이르고, 이제 남은 것은 타오르는 분노뿐인 콜먼에게 갑자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 퍼니아(니콜 키드먼)가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왔기 때문. 70대 남자와 삼십 대 여자, 시각을 바꿔보면 학식 높은 교수와 글자도 채 다 익히지 못한 잡역부. 그래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차갑기만 하다.

<휴먼 스테인>은 필립 로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노련한 감독 로버트 벤튼(<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이 메가폰을 잡았다. 제목인 휴먼 스테인, 즉 인간의 오점은 영화 속의 여러 가지 중요하고 혹은 덜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말. 일차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성품과 학식을 갖춘 소위 그리스 비극적 '고귀한 인물' 콜먼 교수가 지니고 있는 치명적인 비밀을 가리키지만, 한편으로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자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하는 클린턴의 지퍼게이트 사건 같은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지퍼게이트가 그토록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미국인이 수호하는 건강한 가치, 이를테면 공직을 성실히 수행하려면 일차적으로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믿음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산재해있는 문제들(영화가 지적하는 두 가지 병폐 인종과 계급 문제는 그 대표적인 예다) 앞에서 이런 것은 허울좋은 말놀음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콜먼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가치의 허상 때문에 부당하게 지위를 잃게 되는 것처럼. 콜먼 혹은 클린턴이라는 개인의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가식적 도덕이 외려 진실을 잠식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영화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가 된다.

극중 나레이터이자 콜먼의 제자 겸 친구로 등장하는 네이든(게리 시니즈)은 비아그라까지 복용해가며 서른 살도 더 젊은 여성과 뒤늦은 열정을 불태우는 콜먼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얼핏 황혼의 남자와 젊은 여성의 곡절 많은 사랑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휴먼 스테인>을 불길하고 서글프게 물들이는 것은 인종과 계급이라는 미국 사회의 치명적인 환부. 단지 콜먼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한 구실로만 이용되는 것 같던 인종문제는 주인공의 진실이 밝혀지는 중후반부에 이르러 악령처럼 불쑥 떠오르며 관객에게 충격을 던진다.

젊은 시절 극과 극의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콜먼에게 퍼니아는 십대 이후 그를 그 자신일 수 있게 했던 유일한 상대다. 배신이 만들어낸 기만의 삶과 그 악몽 같은 무게. 스스로도 어두운 비밀을 지닌 퍼니아는 콜먼이 진심으로 기댈 사람이자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화 도입부에서 미리 보여주는 것처럼 지친 얼굴로 서로에게 기대던 콜먼과 퍼니아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가공할 진실을 밝혀나가는 것은 나레이터 네이든과 또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언급한대로 <휴먼 스테인>은 '정치적 올바름'의 허상을 지적한다. 스릴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콜먼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관객이 받을 충격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보아야 할 것. 한편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먼이라는 노련하고도 화려한 두 배우가 캐릭터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 같다. 홉킨스는 언제나처럼 숙련된 연기를 펼치지만 주인공의 개인적 배경을 고려할 때 어울리지 않는 선택. 잡역부로 험한 삶을 살아온 캐릭터와 여신에 자주 비유되는 실제 자신 사이의 간극을 스킬로 메우는 키드먼을 보는 것도 그다지 편안한 느낌은 아니다.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스타성은 <휴먼 스테인>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버팀목인 동시에 몰입을 방해하는 한계로 작용하는 셈. 오히려 영화 속에서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은 젊은 시절의 콜먼을 연기한 웬트워스 밀러다. 스타들의 존재감이 사라지며 소박해진 플래쉬백 부분은 기이하게도 <휴먼 스테인>이 가장 진정성을 획득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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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in4rang
인간다움   
2008-10-15 17:08
callyoungsin
가식적 도덕 개인의 진실을 잠식하는   
2008-05-19 13:07
js7keien
연애담론 내면에는, 남녀 각자의 버거운 트라우마와 사회문제가 봉인되어 있었다   
2006-10-02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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