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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 교수의 영화와 정신분석 - '파인딩 포레스터' 또는 '자리 바꾸기'
파인딩 포레스터 | 2001년 4월 20일 금요일 | 서울대 교수(비교문학) 고원 이메일

[파인딩 포레스터]는 뉴욕의 브롱스에 사는 흑인 소년과 백인 작가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23세에 이미 최고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지만 그 이후 작품을 쓰지 않고 오래된 아파트에 칩거하고 있다. 그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망원경으로 주위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고 소년도 그 관찰 대상이 된다. 그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길거리 농구장에 흑인 소년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분적으로 감시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영화에서는 실제로 교사, 농구부 코치, 주차장 관리인, 경찰관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 흑인 소년이 백인 소녀와 둘만이 같이 있을 때, 소녀의 아버지가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아주 당연하다. 그는 학교의 이사장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인이 주인인 사회에서 백인이 감시자의 역할까지 다 떠맡고 있다면 그곳은 정말 숨막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어쨌든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형인 흑인이 주차장 관리인을 맡는 등 조금은 숨통이 열려 있는 상태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형에게 부분적으로 감시자의 역할이 맡겨졌다고 볼 수도 있다. 주인공인 자말의 아버지는 이혼한 뒤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형이 나중에 동생의 방에 들어와서 방 좀 청소하고 지내라 라는 말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동네의 괴짜 아저씨가 사는 집에 몰래 들어간다. 그 아저씨가 던지는 시선을 소년들은 의식한다. 동성애의 시선일 수도 있는 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시선에 아이들은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들은 자말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그 집에 들어가 무엇인가 들고 나오기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눈에 띄는 칼을 가방에 넣어둔다. 주인의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란 나머지 그는 그만 가방을 그 집에 놓고 나온다. 가방 속에는 그의 습작노트가 들어있었다. 방의 주인인 윌리암 포레스트는 그 노트를 읽어본 뒤 수정하고 평가한다. 그리고 가방을 소년에게 돌려준다. 그러면서 자말은 윌리암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윌리암과의 우정을 통해 훌륭한 작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상징의 통속적인 활용에 주목해보자.

그럴 경우 가방은 여성의 상징이 되고 칼은 남성의 상징이 된다. 가방을 메고 들어온 자말은 여자의 자리에 있는 셈이다. 마치 윌리암에게 일용품을 사다주며 일상생활의 잔일을 처리해주는 남자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 가방이 윌리암의 집인 아파트라면 칼은 그 집에 들어온 불청객인 자말이다. 그리고 자말이 메고 온 가방은 윌리암의 집과 연결된다. 윌리암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가방 속에는 칼과 습작노트가 들어있다. 가방 속의 습작노트와 칼은 앞으로 전개될 윌리암과 자말의 공생관계를 암시한다. 서로 상대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말이 가방을 되돌려 받고 두 사람 사이에 인간관계가 만들어진 다음에도 이런 도식적인 설명은 가능하다. 윌리암의 집이 가방인 셈이다. 집주인인 윌리암은 이제 수동적인 역할을 맡게된다. 그리고 능동적인 역할이 주어진 인물은 오히려 자말이다. 자말이 윌리암을 현실로 돌아오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말이 현실에서 좌절한다. 이때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윌리암은 그를 능동적으로 도와준다. 윌리암과 자말은 이와 같은 탄력적이며 유동적인 역할교환을 통해 비로소 흑인과 백인, 성인과 소년, 작가와 독자의 폐쇄적 회로의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말이 현실에서 좌절하는 것은 학교의 문학 선생 때문이었다. 그는 자말의 진로와 운명을 결정하는 칼자루를 쥔 것처럼 되어있다. 재미있는 점은 농구선수의 자격으로 학교의 장학금을 받고 있는 자말이 좌절하는 이유가 이런 권위적/남성적인 존재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대화/상호작용적 관계의 발전에 주목하는 윌리암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거리의 농구장으로 돌아온 자말이 옛날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면서 끝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제 관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들을 지켜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관객들조차도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처음에 보아서 이미 알고 있는 장면이 나오자, 관심이 풀린 상태에서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만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윌리암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 그리고 윌리암과 자말 사이에 벌어졌던 발전의 관계처럼 영화관을 떠난 관객은 마침내 윌리암의 자리에 들어갈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제 그는 윌리암이 차지하고 있었던 빈자리에 들어가 농구장의 그 흑인소년들을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은 이제 영화의 이야기를 다 알게되었다. 제한적이지만 그는 전지적인 작가처럼 전지적인 시각을 확보한 셈이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대작을 발표하고 침묵한 작가가 말년에 가서 비로소 겪게 되었던 역할교환의 유동적인 움직임에 관객 또한 이제 몸을 맡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영화의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 발전한 그는 영화에서 벌어진 사건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 영화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윌리암처럼 자전거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윌리암의 일상생활을 맡아보는 젊은이가 비엠더블류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자신의 비싼 자동차에 신경을 써야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윌리암은 편안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영화에 감동하며 영화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집착할 때 관객은 젊은 윌리암에게 다가왔던 간호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윌리암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던 형이 갑작스레 사고로 죽게된다. 그런데 병원의 간호사는 그 죽은 사람한테는 아주 무관심한 상태에서 유명한 작가인 윌리암과 그의 소설에만 관심을 쏟았으며, 이 사실에 환멸을 느낀 윌리암은 그 이후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소위 감동적인 영화나 문학작품에 대해 관객 또는 독자가 갖기 쉬운 수동적인 모방의 태도는 영화에서 언급된 간호사의 실수를 계속 반복하도록 만들 것이다.

2 )
ejin4rang
분석하자   
2008-10-17 08:44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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