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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것이 아닌 나의 죽음 (오락성 6 작품성 8)
아무르 |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 양현주 이메일

늙어죽는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지만 아무도 반기지 않는 이야기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청춘의 전유물이라는 부지불식의 견해다. 나의 늙음은 얼마나 초라할 지 내 죽음은 또 얼마나 추악할 지 누구도 미루어 짐작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과 늙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진실은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삼키기도 버거운 법이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는 저만치 비켜나있던 노년과 죽음을 목도하게 한다. 폭력의 대가가 말하는 낯선 성찰은 죽음을 초체험하는 두 배우의 연기로 영화가 만들 수 있는 어떤 경지에 도달한다.

<퍼니 게임> <히든> <하얀 리본>까지, 폭력의 본질에 대해 천착해온 미하엘 하네케가 일흔에 접어들어 선택한 주인공은 또래의 부부다. <아무르>는 음악가인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와 안느(에마뉘엘 리바) 부부의 종말에서 시작된다. 싸늘한 시체가 누워있고 공기 중에는 고약한 썩은 내가 진동한다. 영화는 시작부터 곤혹스러운 결말을 공개하고는 과거의 평온한 일상으로 태연하게 돌아간다. 소담하고 고풍스러운 가구들, 응접실 한 켠에 놓여 있는 그랜드 피아노, 따스하게 내리쬐는 채광까지, 집안 구석구석에는 부부가 함께 해온 시간들이 먼지처럼 쌓여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죽음의 전조를 연주한다. 단란한 아침식사 테이블에서 아내 안느는 평온한 얼굴로 정지해 있다. 정지 화면이 아니라 홀로 자신만의 세계에서 멈춘 채로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남편 조르쥬가 안절부절 못 하는 상황에서 거짓말처럼 안느는 다시 돌아온다. 눈앞에 있지만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두려운 순간이 반복되고 안느의 마비 증세는 일상에 균열을 가져온다.

<아무르>는 건조하고 스산하다. 단 한 번도 집안을 벗어나지 않는 카메라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년의 일상과 닮아 있다. 그들이 쌓아온 작은 성에서 맞는 파국은 조용하고도 천천히 숨통을 조여 온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 음식을 잘라주는 것은 먹여주는 것으로, 옷을 입혀주는 것은 벗겨주고 용변을 처리해주는 것으로. 안느의 신체는 온전히 타인에게 맡겨져야 한다. 회한과 절망, 적막이 교차하는 조르쥬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문득 오프닝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에 희망이나 반전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서서히 죽어 가는가를 고개 돌리지 못 하고 지켜보게 된다. 관객은 이들이 어떻게 만나 사랑을 하고 일상을 쌓아왔는지 알지 못 한다. 시작은 개별적이었을지 언정 죽음이라는 끝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래서 이 조용한 고통은 광범위한 보편성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조르쥬는 소멸해가는 아내를 돌보며 점점 짧아져가는 자신의 생명선을 미리보기한다. 이 스산한 죽음을 보고 있자니 동일한 선택을 했던 사상가 앙드레 고르가 떠올랐다. 사르트르가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 일컬었던 노동이론가 앙드레 고르는 죽기 전 아내에게 편지를 남긴다. 60년 전 첫 만남부터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현재까지를 기록한 90페이지 분량의 편지다. 'D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된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네.' <아무르>의 것과 동일한 무늬의 파고가 그려진다.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는 것, <아무르>의 태도는 문학성에 가깝다. 심장에 일어난 파문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2012년 12월 18일 화요일 | 글_프리랜서 양현주(무비스트)    




-노년의 초체험
-<심플 라이프> <엔딩 노트> <아무르> 올해의 황혼 트릴로지
-황금종려상으로 보답할 수 없는 두 배우의 연기
-예술영화 내 취향 아니야(관람 후 지나가던 관객 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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