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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선데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2004년 6월 17일 목요일 | 김용필 작가 이메일

한때 우리는 과거 청산이라는 명목아래 엄청난 죄를 저지른 자들을 청문회에 끌어내어 기억에 없다는 몇 마디 변명을 듣고 죄를 사하였다. 당연히 죄를 사하여 줄 사람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본인들 스스로를 용서해 버린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들의 만행이 온 천하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그 유족들은 만족했다. 이제는 떳떳하게 평범한 삶을 살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말 한마디 못하고 억울하게 억눌려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었다.

우리에게 5. 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다면 아일랜드에 블러디 선데이가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건은 모두 일요일에 벌어졌다. 시민들의 평화적 시외에 군사작전이 전개되었고 무고한 시민들이 무장세력이라는 누명을 쓰고 쓰러진 이유 또한 같다. 그리고 여전히 그 날의 총성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같다. 그럼 여기서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이 왜 시작되었는지 부터 살펴보자.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원했던 영국 왕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의 인정을 받지 못하자, 1543년 카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성공회’를 설립한다. 아일랜드에도 개종을 강요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17세기에는 크롬웰이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굴복시키면서 역시 개종을 요구했다. 이후 아일랜드는 수 백년 동안 영국에 토지를 몰수당하고 소작농으로 살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이 전개됐으며 1921년 자치령을 획득한다. 하지만 영국이 다수의 신교도들을 북아일랜드에 이주시켜 신교도가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북아일랜드는 독립에서 제외시켰다. 영화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영국정부의 차별에 반대하고 시민권을 주장하기 위해 평화행진을 벌인 북아일랜드 데리시의 모습을 담고 있다.

북아일랜드에서 모든 집회는 불법이라는 군인들의 강경한 기자회견과 일요일에 평화행진을 강행한다는 데리시민권협의회의 기자회견을 교차로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미 기자회견만으로 전운이 감도는 느낌이 들 정도로 카메라는 빠르게 이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데리시민권협의회 대표이자 영국의회 하원의원인 아이반 쿠퍼는 영국군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IRA의 방식에 반대하는 인물이다.

1972년 1월 31일 일요일의 날이 밝는다. 그저 단순히 행진을 할 뿐이라며 사랑하는 연인을 안심시키는 청년이 있고, 이제 막 교도소에서 출소해 다시는 잡혀가고 싶지 않다며 친구들의 놀림에 아랑곳 않고 뒤로 빠지는 소심한 청년도 있다. 여느 때처럼 평화롭게 아침을 마친 가족이 있는가 하면 거리에는 이미 몇몇 불량스런 다혈질의 청년들이 모여 길을 막아서는 군인과 경찰에 욕을 해대기도 한다. 데리시 역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임을 보여주는 순간에도 이들이 행진하기로 했던 코스는 이미 경찰과 군인들이 하나 둘 장악한다.

쿠퍼는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평화행진에 참여하라고 부추긴다. 때로는 경찰들에 맞서 거칠게 항의하는 청년들을 떼어놓고 평화적 시위임을 강조한다. 강경 진압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화적으로 이 행진을 이끌어야 한다. 한쪽에서는 군인들이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아일랜드의 결합을 꿈꾸는 무장세력 IRA가 여차하면 군인들과 무력으로 충돌하기 위해 이들을 주시한다. 하나 둘 시민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하고 금새 시위대는 늘어가 도로를 가득 메운다. 그리고 서서히 행진이 시작되고 군인들의 행보도 빨라지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영화는 시민들에게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들이대는 색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그동안 이런 류의 영화들은 시민들의 입장에서 시위현장을 바라보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민들과 군인들을 지켜볼 뿐이다. 어느 한쪽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 관찰자적 태도를 취한다. 때문에 철저하게 계산된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좀더 사실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다. 실화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평화행진이 벌어졌던 당시 그 거리에서 촬영됐으며 시위에 참가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몰려두는 시민들과 발빠르게 상황을 주시하는 군인들 그리고 상황실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받는 군 수뇌부의 모습이 빠르게 교차되면서 시민과 군인들은 더욱더 가까워진다. 당초의 행진로를 차단한 군인들에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하는 청년들을 뒤로하고 대열은 또 다른 길로 빠져나가면서 총성이 울려 퍼지고 그 날의 비극이 시작된다. 겁에 질려 스스로 정당방위였다고 되뇌이는 군인들은 총을 든 자가 보이지 않는다 면서도 총을 쏘아댄다. 이미 처음부터 강경 진압이 목표였던 만큼 수뇌부는 어떻게든 상황을 유리하게 꽤 맞추려 한다.

스스로 잘못된 진압이었음을 인정하던 병사마저 증언대에서는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증언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까지를 담담하게 보여줄 뿐 영화는 그들이 범죄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정치적인 희생양일 뿐이기 때문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감정에 치우칠법하건만 내내 쉬지 않고 움직이는 카메라를 쫓다보면 관객 스스로 느끼게 된다. 과연 우리의 아픈 과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안처럼 보여질 정도로 수작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마치 추모 곡처럼 U2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건을 쫓아가다 미처 숨진 사람들의 명복을 빌지 못한 사람들의 감정을 추수리라는 듯 앤딩 크레딧이 모두 끝난 후 암전상태에서도 음악은 흐른다. 내내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던 영화는 오히려 이 한 곡의 음악으로 더욱 강렬하게 강요한다. 그것이 군인이었든 시민이었든 아픈 현실을 더 이상 겪지 말자고 말이다.




4 )
ejin4rang
아픈영화다   
2008-10-15 16:50
callyoungsin
서민들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2008-05-16 15:14
qsay11tem
예술은 목적이 있으면 영 ..   
2007-11-23 14:24
ldk209
아... 아일랜드여~~~ 광주여....   
2007-01-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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