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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로봇' 써니가 말하는 웰빙(well-being) | 2004년 7월 26일 월요일 | 협객 이메일

나 잡아봐라! 같은 듯 다른 ‘써니’
나 잡아봐라! 같은 듯 다른 ‘써니’
<아이 로봇>은 SF영화가 지녀야 할 미덕을 갖춘 영화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에 기대어 탄탄히 쓰여진 시나리오는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을 매료시키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거기에 <다크시티>, <크로우>의 감독이었던 알렉스 프로야스는 근 미래 도시의 모습을 특유의 고딕적인 분위기로 담아내 인간 대 로봇의 대결을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철학적 깊이로 그려낸다.

2004년에 유행하던 운동화를 신고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들으며 아침을 시작하는 델 스프너(윌 스미스). 스프너의 아침만 보더라도 그가 살고 있는 2035년은 관객의 현재와 영화 속 미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점은 달리 말해 스프너가 겪게 되는 기계문명에 대한 고뇌가 고스란히 인간세계의 질서/존재론에 대한 물음으로 귀착됨을 말하기도 한다. <아이 로봇>은 이렇듯 초반부터 명확하게 드러나는 주제로 늘어지지 않고 탄탄히 끝가지 흘러간다.

2035년 인간들은 냉장고 없이 살기 힘들 듯, 가정용 로봇을 가전제품처럼 집안에 장만해 두고 산다. 로봇은 인간을 대신해 애완동물 산책을 시키고 요리를 하며 가정을 지켜준다. 그러나 스프너 형사는 로봇을 싫어해 그의 할머니가 로봇을 장만하려는 것조차 말린다. 스프너는 로봇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악몽을 가지고 추론해 볼 때, 그는 로봇을 싫어하기보다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로봇만 있으면 말 그대로 ‘웰빙’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프너의 로봇에 대한 적대감은 NS-5형 로봇 ‘써니’를 통해서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계’에 대한 두려움을 모르고 사는 현재의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띄운다.

‘로봇 3원칙’에 의해 인간을 결코 해하거나 배신할 수 없는 로봇들.
그러나 철저하게 로봇 3원칙에 움직이는 로봇 즉, 기계들이 이 계율을 어길 수 있다면, 이야기는 스프너의 두려움에 근원인 인간을 초월한 기계의 자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과 같은 작법으로 만들어진 로봇 ‘써니’는 그래서 특별하다. 로봇의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써니’라는 기계는 무생물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영혼(꿈을 꾸는 존재)을 가진 존재이므로 인간과 명확히 구분되는 경계를 허물어뜨린 로봇이다. 신형 모델 NS-5 로봇은 인간들에게 급속도로 보급되고 드디어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써니가 ‘로봇의 존재’에 대한 고뇌를 할 때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비키는 그 존재론적 물음의 해답을 스스로 깨달아 ‘로봇 3원칙’을 깰 수 있는 인간들의 존재질서의 모순을 찾아낸다. 인간을 전쟁과 폭력 앞에서 보호하기 위해 인간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원칙을 깬 비키.

그러나 인간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기계의 논리를 ‘악의 축’으로 내 몰수 없는 까닭은 진화한 기계의 논리가 우리 인간세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반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화<아이 로봇>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스프너 형사가 가진 ‘기계문명에 대한 두려움’은 주인공 혼자 해결해야 될 고민이 아니었다. 의심 많은 인간이 진화하는 로봇을 단지 기계라는 이유만으로 신뢰하는 모습은 어리석게까지 보인다.

결전의 순간 의상은 항상 ‘가죽’
결전의 순간 의상은 항상 ‘가죽’
<매트릭스> 존재론에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세계관을 짬뽕해 논 <아이 로봇>은 오버하지 않고 철학적 주제를 쉽게 풀어가면서 대중적인 화면에 녹여낸다.
1000커트가 넘는 장면들로 연출된 로봇의 반란 장면과 써니(로봇)대 로봇의 대결은 극적인 움직임을 여러 대의 카메라로 찍어낸 것처럼 입체적인 각도로 보여준다. 관객의 호흡마저 조절하는 순간적인 slow-motion은 빠른 편집에 의해 로봇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드라마틱한 비쥬얼로 뽑아낸다.

단점보다 장점이 월등히 많은 <아이로봇>이지만 몇 개 안 되는 단점이 그래서 더 아쉬운 영화다. 일단 로봇 심리학자로 나오는 수잔 캘빈(브리짓 모나한)박사의 심경변화가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다. 이미지로 승부 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는 내러티브의 세밀함을 그다지 요구하지는 않았다.

인물의 심리, 이야기의 인과율은 오감을 압도하는 스펙터클 한 이미지들의 강렬한 감흥 때문에 소홀히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캘빈박사는 주인공 스프너 형사의 조력자와 나와 사건을 이끌어 가는 여주인공이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로봇 메커니즘의 대가인 그녀가 진화한 로봇 “써니”의 말 한마디에 의해 자신의 인생관을 한순간에 바꾸는 설정은 후반의 극적 긴장감을 떨어지게 한다.
남성영웅의 옆에는 인텔리 한 ‘여성’ 조력자가 파트너로 나와 위기를 모면하고 사건을 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정형화 된 공식으로 캘빈박사를 보자면 공식에 소비되는 캐릭터 일 뿐이다.

또한, 고착화 된 영웅의 이미지가 여전히 <아이로봇>에서도 남용되고 있다. 윌 스미스가 연기한 스프너는 로봇이 주는 웰빙 인생을 포기하고 주류의 삶을 거부하는 반항아로 나온다. 거기에 반항아를 상징하는 클리셰인 가죽쟈켓을 줄기차게 입고 나오고 건들건들 걸으면서 거대기업의 사장을 깔아뭉갠다. 일개 형사가 세계를 좌지우지 흔드는 기업의 총수에게 로봇 메카니즘을 비판하는 장면은 ‘영웅’의 자질을 아무 때나 남발하는 영화적 ‘객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시니컬하게 보이려고 선보인 윌 스미스의 유머도 그다지 재치 있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나쁜 녀석들>의 속편 유머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물론 클리셰를 남발하는 스프너 형사의 영웅이미지가 <아이로봇>의 구조 속에서 어설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개념의 영화기술 진보는 있는데 캐릭터의 진화는 전혀 없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문제점을 여전히 <아이로봇>은 노출시키고 있다. 왼쪽 팔이 기계인 스프너 형사의 로봇에 대한 적대감은 상징성이 크지만 그것을 소화시키는 캐릭터의 힘은 약하다는 말이다.

<아이로봇>은 SF 영화장르의 진화를 선보인 작품이지만 블록버스터의 개념 자체를 바꾸는 철학은 부재하다. 로봇 ‘써니’의 말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뇌리에 남는다.

“웬만하면 살았으면 좋겠다”

‘폐기’가 아닌 ‘죽음’의 뜻을 정확히 아는 로봇 써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끈질긴 ‘생명력’을 하나의 진화한 인격체로 승화시키는 영화 메커니즘의 결정체인 듯......

5 )
ejin4rang
로봇되게 멋있다   
2008-10-15 14:58
callyoungsin
아이로봇 정말 잘만든 한편의 판타지엿어요 로봇의 반란...   
2008-05-16 14:57
qsay11tem
볼만한 SF 영화네요   
2007-11-23 14:14
ldk209
다음엔... 로봇들이 오만한 인간들을 혼내주길...   
2007-01-15 10:21
jukjeon
글쓰기 훈련을 좀 더 하셔야겠습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리뷰를 쓰시고 싶다면....   
2004-08-12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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