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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비밀’에 얽힌 또 하나의 비밀?-‘올드 보이’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3년 12월 8일 월요일 | 이해경 이메일

(경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다른 지면에 실린 글에서, 저는 <올드 보이>를 매우 잘 만든 영화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의 말미에서 그런 제 판단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했지요. 영화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던 겁니다. 그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모종의 의심을 떨칠 수 없어 저는 이렇게 썼지요. ‘그 의문에 비하면, 이 영화에 숨어 있는 두 가지 비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만 말하고 그 글을 맺었습니다. 여기서 그 얘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못 본 분들, 그 가운데 이 영화를 보려는 분들, 그 중에서도 영화 속 ‘두 남자의 비밀’을 모르는 상태로 보고 싶은 분들은, 이 글을 더 이상 읽지 마십시오. 그럼 제 얘기를 시작… 아, 잊고 넘어갈 뻔했네요. 제가 수상히 여긴 영화 속 문장은 이것입니다. ‘바윗돌이나 모래알이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그 문장은 영화에서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동안 가두었다가 풀어주고 나서 오대수에게 보내는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대수는 무슨 소린지 모르고 넘어갔다가 나중에야 그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게 되지요. 도대체 그가 나를 가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여자의 목숨이 달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오대수는 마침내 잊혀졌던 옛날의 기억 하나를 되살려냅니다. 서울로 전학 가기 전에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오대수는 이우진이 누나와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훔쳐보다가 들켰던 겁니다. ‘말이 많은’ 오대수는 이사 가는 날 친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고, 날개 돋친 소문은 이우진 남매의 귀에까지 들어가 누나의 배를 불러오게 하고, 상상 임신인 줄도 모른 채 누나는 조카의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죄책감에 동생이 보는 앞에서 목숨을 버리게 되고…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올까요. ‘바윗돌이나 모래알이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이우진이 자신에게 복수심을 품게 된 내막을 알게 된 오대수는, 자신 또한 이우진을 향한 복수의 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지 않을 수 없도록 이우진이 최면을 걸어 놓은 탓이지요. 함께 최면에 걸려 오대수를 사랑하게 된 여자 미도가 이우진의 복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너무 심한 게 아니냐고 오대수에게 말합니다. 이우진이 그들 연인에게 가하려는 진짜 복수가 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때 오대수는 문제의 그 문장을 되새깁니다. 이우진은 그런 인간이라는 거지요. 오대수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15년씩이나 갇혀 지내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 딸과 몸을 섞게 되는 지독한 형벌을 받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이우진은 이런 식의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다는 겁니다. 작든 크든 잘못은 잘못이야. 오대수는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혀를 놀리고는, 남의 일이니까 쉽게 잊고 살았지. 그 하찮아 보이는 잘못이 우리 누나를 죽음으로 몰아갔어. 바윗돌이나 모래알이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니까.

말 한번 잘못한 죄로 한 인생이 망가져서야 되겠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죄를 응징하는 인간이 영화에 나와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구요. 문제의 그 문장 또한 자체로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단, 오대수의 입을 통해 한번 더 나오게 되기 전까지는요. 오대수가 이우진은 그런 생각을 가진 놈이라고 말하는 순간, 저는 이건 감독의 대사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지요. 그 의심이, 감독은 이 영화의 복수를 납득하고 있을까 하는 다른 의문을 낳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아니면, 감독은 단순히 그 메시지의 의미를 관객이 이해하지 못할까 봐 친절을 베풀었을까요? 그런 것은 이우진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통해 이루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오대수가 그 문장의 의미를 깨닫는 모습도 보여줄 필요가 있었겠지만, 그렇게만 봐주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한 대사였거든요. 혹시 감독은 관객이 이우진의 복수를 납득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오대수의 입을 빌려 관객의 납득을 돕고자 했다면, 그것은 역으로 자신의 영화를 못 미더워하는 감독의 덧칠과도 같은 것은 아닐지…

이우진의 복수가 말이 되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보편적인 기준으로 따지는 것 말입니다. 어쩌면 말 안 되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우리가 사는 현실의 보편적인 풍경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그 복수를 납득하지 않을 사람이면, 영화에서 무슨 수를 쓴다 해도 납득시키지 못할 겁니다. 그 또한 대체로 통할 만한 인간 사회의 진실이지요. 그러니까, 남는 것은 영화의 내적 완결성 그 하나 아닐까요? 영화 안에서 말이 되면 그만이라는 얘기지요. 만약에 감독이 이우진이라는 인물을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가둬 놓고 즐긴다거나 뭐 그런 캐릭터로 설정했다면, 복수고 뭐고 아무것도 납득시킬 필요가 없었겠죠. 그냥 저절로 말이 되니까 속 편한 거죠.

박찬욱 감독은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선과 악의 단순명확한 이분법적 구분을 거부하고, 대립하는 두 인물을 모두 복합적인 캐릭터로 그려냈지요. 성공입니다. 그런데 캐릭터에 성공하다 보니 다른 숙제가 생겼겠죠. 영화의 대사를 빌리면, ‘먼저 누구냐’는 성공했는데 ‘그리고 그 다음에 왜냐’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여기서 이우진의 매력적인 캐릭터가 오히려 짐이 된 것이 아닐까요? 그는 가깝기로 따지면 싸이코에 가까운데, 냉혹하고 치밀하고 침착하고, 분노를 터뜨릴 줄도 알고, 분노를 삭일 줄도 알고, 그 모든 게 허망하다는 것도 아는, 그야말로 ‘well made’ 싸이코잖아요. 그 격조에 걸맞는 대접이 필요한 거죠. 그냥 입이 가벼운 오대수 때문에 사랑하는 누나가 죽었으니 복수하고야 말겠다, 이래가지고는 이우진에게 어울리겠냐… 그래서 생각해낸 게 바로 그 ‘바윗돌, 모래알…’ 하는 문장이 아니었을까, 저는 그런 추측을 해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장만 나오지 않았다면, 저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영화 감상에 몰두하는 관객이 되었을 거라는 푸념을 이제껏 늘어놓았던 셈이구요. 그러니 영화 막판에 감독의 비밀이나 캐고 앉아 있던 저로서는, 때마침 영화가 드러내는 두 근친상간의 비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5 )
joe1017
전 올드보이 좋은 영화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데...   
2010-03-16 16:03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32
kpop20
소설도 있군요   
2007-05-18 23:25
satori108
영화는 소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올드보이는 소설과는 영화가 다르다는 점을 너무나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수작입니다...박찬욱 감독의 색채에 대한 센스와 음악에 대한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완벽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그 노력에 존경의 박수를 보냅니다...박감독 팬이 되었습니다...   
2005-02-10 03:35
imgold
각 배역마다 캐스팅도 나무랄데가 없는것 같아요. 그 배우들이 아니면 그 역할을 누가 해냈을까...합니다.   
2005-02-01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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