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홍상수의 권리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고
이해경의 무비레터 | 2004년 5월 16일 일요일 | 이해경 이메일

‘<오! 수정>까지 저를 즐겁게 해 줬던 홍상수는 <생활의 발견>에서 일단 바닥을 드러내 보인 셈이니……’ 이 코너에 올렸던 어떤 글에서 제가 한 말입니다. 이제 그 말의 꼬리를 물고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생활의 발견>에서 일단 바닥을 드러내 보인 홍상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이르러 혹시 이게 다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홍상수 감독은 왜 자꾸 영화를 만드는 걸까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고 났더니, 홍상수는 혹시 감독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매너리즘에 빠졌다, 즉 타성에 젖었다는 비판 이상으로 혹독한 의심인데요. 빠지거나 젖은 것은 빠져나오거나 말리면 되니까 큰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밑천이 바닥난 거라면 어쩝니까? 바닥난 줄 알면서도 하던 일이니까 계속 하는 거라면? 그러지 못하게 할 권리는 홍상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제 의심의 근거는 웃음의 소멸에 있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강원도의 힘>을 거쳐 <오! 수정>에 이르기까지, 저는 홍상수 영화의 핵심을 ‘웃음’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현실에서는 지극히 평범해서 기억나지도 않을 장면이, 영화에서 보여지니까 무지하게 웃기는 거 있죠. 홍상수 감독은, 사람들이 의식 못하고 넘어가는 현실의 우스꽝스러움을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영화에 대한 관습적인 기대감을 배반할 때 거둘 수 있는 효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히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오! 수정>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홍상수 영화의 정점이었습니다. 제 식으로 말하면 가장 웃기는 영화였지요. 그래서 저는 그 다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걱정 반 기대 반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뭘 더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걱정과, 뭔가 달라지겠지, 그런 기대…… 한마디로 기대는 무너지고 걱정은 맞아떨어진 것이 <생활의 발견>이었습니다. 영화가 뻔하더라는 겁니다. 잠깐, 그게 홍상수 영화에서 문제가 되나요? 홍상수 영화는 원래 뻔한 맛에 보는 거 아닌가요?

<오! 수정>까지 홍상수의 ‘뻔함’은 긴장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뻔한데 뻔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보면서 웃을 수 있었던 겁니다. 지나고 나면 다 뻔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나가는 순간들이죠. 그런데 <생활의 발견>에 이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뭐랄까…… 이제는 속이 들여다보인다고 할까요? 이제는 아무리 엉뚱하게 틀어도 심드렁하다니까요. 그러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지 않은 길로 가도 이미 가본 길 같다는 느낌. 전에는 심드렁한 장면도 심드렁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심드렁하지 않은 장면도 심드렁해 보인다는 거죠. 누구를 탓해야 하나요?

새로 나온 라면이 있는데 맛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자꾸 먹다 보니 처음 그 맛이 아니에요. 그럴 때 누구를 탓해야 하나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라면 회사에서 쓰는 재료나 들이는 정성이 예전만 못하다. 둘째, 라면 만들기는 한결같은데 먹는 사람이 식상해서 맛이 떨어지는 것으로 느낀다. 어떤 경우든, 먹는 사람이 자기 입맛을 탓하겠습니까?

분명히 홍상수 영화는 <오! 수정>을 정점으로 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를 예로 들까요. 흔히들 홍상수 영화에서 연기는 연기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닐 겁니다.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사실 그것 말고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홍상수는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내는 연출력이 뛰어난 감독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유일하게 높이 살 수 있는 것은 성현아의 연기입니다. 꾸밈없이 자연스럽지요. 더 정확히 말하면,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을 참 잘 꾸며내고 있지요. 한마디만 더 보태면, 어색함을 정말 어색함으로 보이게……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김태우와 유지태는 잘 안 될 때가 많잖아요.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티를 너무 냅니다. 어색함도 인물의 어색함이 아니라 배우의 어색함으로 느껴지고…… 요컨대, 홍상수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의식하고 내보이려 한다는 거지요.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웃음을 못 주지요. 한 끗 차입니다. 고스란히 감독의 책임으로 돌려야 마땅하겠지요.

홍상수 영화가 끝장을 본 게 아니냐는 제 의심이 어긋나기를 바랍니다. 다음 영화를 또 기대해야죠. 예전만큼만 만들어줘도 저는 즐거워하겠습니다. 그런데 관객의 착시 현상은 인정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더 맛있게 만들지 못하면 라면 맛이 떨어졌다는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는 겁니다. 아예 다른 걸 만들어낸다면 맛의 수준을 비교할 것 없이 그저 새로움으로 어필할 수 있겠지만, 홍상수는 아마 그러지 않거나 못할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계속 같은 것을 만들어낼 생각이라면, 더더욱 변화가 요긴한 거 아닐까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권리도 홍상수 감독 말고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6 )
loop1434
잘봤습니다   
2010-07-04 15:14
apfl529
좋은 글 감사~   
2009-09-21 18:28
qsay11tem
오 부러워라   
2007-11-27 12:56
kpop20
정말 제목처럼 여자는 남자의 미래일까?   
2007-05-18 22:54
sweetybug
흠.. 전 여자는 남자의,, 를 봤거든요.. 그런데 뭘 전달하려는건지 이해가 안갔어요..ㅜㅠ   
2005-02-13 16:56
imgold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을 너무 재밌게 본 저로선 여자는,,은 약간 싱거웠는데요..   
2005-02-01 16:49
1

 

1 | 2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