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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시>를 두번 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2010년 5월 28일 금요일 | 백건영 영화평론가 이메일


이창동의 <시>를 두 번 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언제였을까. 먹먹해진 가슴을 다독이면서 이창동의 영화들을 매만졌고 그 속에 담긴 것들을 곱씹었다. <오아시스>를 본 후 내몰린 자들의 공간적 우화로 읽고는 강요받은 선택의 서사에 대해 호된 비판을 가한 나였다. 그런 와중에도 내겐 이창동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나

영화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비평가의 권리라고 치더라도, 때론 그 어떤 언어로도 포획할 수 없는 영화와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런 영화가 엄연히 존재한다. 말하자면 비평의 칼날로도 도저히 벨 수 없는 영화의 탄생일 테다. 나는 <시>를 통해 그것을 목도했다. 무조건 칭찬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망원경으로 봐야 할 것과 현미경을 들이밀어야 할 대상을 혼동하지 말자’는 것이다. 정말로 당신이 보았던 영화가 걸작임을 깨달은 순간, 그 영화가 서사와 묘사의 탁월함으로 다가왔는지를 되물어 보라. 수잔 손택의 전언대로 「예술은 해석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순수한 경험 그 자체」가 아니었는지를. <시>를 보면서 오래전 인용한 T.S.엘리엇의 《황무지》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울었노라, 레만 호숫가에서…(I Wept by the water Leman…).」 그리하여 나 역시 울고 반성하였노라. 이 괴물 같은 영화를 보기 전까지 ‘비평가의 권리’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따지기에 급급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시>에서 양미자는 사지 불편한 노인과 몸을 섞는다. 아니 이렇게 말해야 옳다. 노배우 윤정희가 옷을 벗는다. 몸으로 범한 손자의 죄를 제 몸으로 씻고자함이었을까. 죄의 일부를 짊어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여배우는 아무 때나 옷을 벗지 않는다. 벗어서는 안 된다. 저마다 영화를 위해 옷을 벗는다고 말해대지만, 모든 것이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될 수는 없는 법이다. 여배우가 옷을 벗는 다는 것이 분명 쉬운 결정은 아니다. 특별히 <시>의 경우처럼 체념과 절망과 회한이 뒤엉킨 몸짓을 위한 여배우의 알몸은 그래서 정치적이거나 윤리적일 수밖에 없다. <어바웃 슈미트>에서 캐시 베이츠가 옷을 벗고 세상만사 평지풍파를 모두 받아드렸을 법한 어머니의 대지 같은 육체를 드러냈을 때, <몬스터 볼>에서 남편의 사형집행관 빌리 밥 손튼 앞에서 “나를 좀 기쁘게 해줘 봐요”라며 할리 베리가 옷을 벗었을 때, 그것은 치명적 유혹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절망 끝에 선 자가 부르는 희망의 노래도 아니었다. 윤정희의 표정 또한 그러했다. 백일홍 꽃잎에 이슬 맺히듯 눈가를 적시는 고통의 눈물이다.

그렇게라도 대속하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꽃다운 소녀의 죽음은 아랑곳 않은 채 자기 자식의 미래만을 걱정하는 이기적인 사람들과, 가해자이면서도 천연덕스럽게 TV오락프로에 정신을 빼앗기고 희희낙락하는 손자의 모습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할머니의 죄책감은 그리도 컸나보다. 종달새의 종알거림을 멈추고 그렇게 윤정희는 옷을 벗는다. 여배우가 옷을 벗어야 할 가장 완벽한 순간이 존재한다면 이런 때일 것이다.




<시>의 무시무시한 오프닝. 교복차림의 여학생이 강물을 바라보고 엎드린 채로 떠내려 온다. 강 언덕에서 노닐던 아이들 무리 중 이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한 (<밀양>에서 유괴 살해당한 ‘준’이를 연기했던) 아이뿐이다.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이야기가 인간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의 방증이자 이 영화가 ‘방관자’를 향해 쓰여 졌음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밀양>과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도무지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날들의 연원이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주범의 무리에 혈육이 가담되어 있음을 알게 된 절망적 순간에서, 피눈물을 흘려 추한 것들을 막아내는 방패가 되고자 했던 그녀. 맨드라미 꽃말처럼 그녀는 시 한 편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터였다.

사죄보다 물질적 보상이 우선인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위로와 애도보다 살아있는 이들의 걱정 때문에 서둘러 봉합하고 무마하려는 뻔뻔한 무리들 앞에, 이창동은 ‘아녜스의 노래’를 들이민다. 조용한 파문으로 우리에게 권한다. 가끔은 하던 일을 멈추고 도도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라고. 강물에 떠내려 오는 것이 무엇인지도 쳐다보라고. 맑고 깨끗했던 예전의 강이 맞느냐고. 꽃이 지고서야 봄이었음을 깨닫는 우매한 짓은 다신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한 편의 노래가 되고 경구가 되며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증인이 되어버린 영화 <시>. 그것은 내겐 ‘아무리 빨라도 늦어버린 깨달음’의 다른 말이다. 그게 너무 가슴 아파서 울 수밖에 없었나보다.

글_백건영 영화평론가(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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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maximus
난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적이 한번도 없어   
2010-08-16 17:18
dsimon
즐거운 화요일 보내세요.^^   
2010-08-10 00:47
niji1104
정말 좋은 영화였어요   
2010-06-24 01:45
skidoo9
좋은 영화를 제대로 평가한 영화평이라 끝까지 읽었답니다. 정말 좋은 감독 이창동!   
2010-06-16 10:14
monica1383
잘 읽었네요   
2010-06-10 02:54
fkcpffldk
어려운 영화라고 하던데요   
2010-06-08 17:07
bubibubi222
아직못봤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2010-06-03 22:09
iamjo
기대!   
2010-06-02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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