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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폭력성을 먹고 산다
2011년 12월 2일 금요일 | 최승우 이메일

요즘은 주말 밤마다 케이블 TV 스포츠 채널을 틀면 유럽의 축구리그 중계를 흔히 볼 수 있다. 포털사이트 메인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니 독일 분데스리가니 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물론 한국선수들이 꽤 여럿 진출해있다는 게 결정적인 이유겠지만, 어쨌든 미디어 입장에서는 유럽축구가 꽤 매력적이고 잘 팔리는 콘텐츠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유럽축구 중계를 한 번이라도 보면 느낄 수 있다. 경기장의 분위기 자체가 국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무엇이 다를까. 닉 혼비의 자전적인 소설을 영화화한 <피버 피치>를 보면 이런 차이가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폴(콜린 퍼스)는 그야말로 축구에 미친 인간이다. 여기서 ‘미쳤다’는 표현은 비유가 아니다. 사전적인 의미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아스널)이 무조건 두 골 이상 차이로 이겨야 만족하며, 동생 결혼식 날짜를 ‘아스널 경기 다음날’로 기억하는가 하면, 아파서 쓰러진 여자친구를 병원에 데려가야 할지 축구를 봐야 할지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과연 정상인가 말이다. 물론 극성맞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팬들의 특수성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폴의 캐릭터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느 스포츠에 비해 유별난 전 세계 축구팬들’의 바로미터에 가깝다. 아직까지 국내에서 스포츠 관람은 여가를 즐기는 행위에 가깝다. 반면 폴 같은 사람이 떼로 모여 있는 유럽의 축구장 분위기는 비장하다. 몇 만 명이 똑같은 레플리카를 입고 웅장한 북소리에 맞춰 서포팅 송을 일사분란하게 불러 젖히는 모습은, 그렇다. 전장과 흡사하다.

‘20XX년, 서울을 연고지로 한 축구팀이 새로 창단된다. 어느 억만장자가 구단주인 이 팀의 이름은 ‘강남 노블레스’. 같은 해, 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은 순수 시민구단 ‘강북 유나이티드’가 창단된다. 두 팀이 맞붙는 ‘한강 더비’가 열리는 날이면 상암동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강북 최고의 스타인 A 선수가 강남으로 덜컥 이적하는 사건이 터진다. 강북의 열악한 재정 탓에 실력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했던 A는, 강남이 제시한 엄청난 몸값의 유혹에 이적을 결심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두 팀 팬들 사이의 감정은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데…’

영화의 시놉시스 같은 이 이야기는 물론 가상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국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팀은 아스날, 첼시 등 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만 무려 5개에 이른다. 2,3부 리그, 이름 모를 영세한 클럽 팀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정확한 데이터 없이 어림짐작만 해보더라도, 서울 정도의 대도시라면 3~4개의 축구팀을 보유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특히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강북에 한 팀, 강남에 한 팀이 생긴다면 꽤 흥미로운 세일즈 포인트가 되겠다. 장담하건데 틀림없이 흥행 대박 난다. 누군가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겠지만. 동해물을 후루룩 마셔버리고 백두산을 깎아내릴 기세로 국민대통합에 힘써도 모자를 이 판국에! 빈부격차와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물론 타당하고 일리 있는 얘기다. 그러나 관점을 조금 돌려 생각해보자.

축구는 유독 내셔널리즘, 또는 지역주의와 밀접하다. 유럽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보기 위해 축구는 종교만큼이나 매력적인 소프트웨어다. 100년 넘게 이어져온 전설적인 라이벌전은 국가 간의 관계, 경제적 차별, 구조적인 격차 등의 뿌리 깊은 갈등과 맥락을 같이 한다. 스코틀랜드의 ‘올드펌 더비’는 카톨릭 이주민(셀틱)과 개신교 토착민(레인저스)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의 잔재다. 스페인의 ‘엘 클라시코 더비’는 군부독재정권과 부유층의 상징(레알 마드리드)와 탄압받던 소수민족의 자존심(바르셀로나)의 싸움이다. (그런 바르셀로나가 이제는 엄청난 자금력으로 스타 플레이어들을 쓸어 모으는, 자본주의의 공룡이 되어 공공의 적으로 불리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이들은 단순히 현실의 억하심정을 축구장에서 쏟아내는 ‘루저’들에 불과할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일종의 소속감이다. 축구장에서 서포터즈 사이에 섞여 고래고래 악을 지를 때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실감하고, 스스로를 확인하게 되는 안도감. 아스널의 우승이 걸린 일대 결전을 앞두고 폴이 참전용사처럼 뛰쳐나갈 때, 주위 사람들은 응원한다. “꼭 이겨! 잘해라!” 한눈에 봐도 변변치 못한 폴의 지리멸렬한 인생에서는 ‘폴=아스널’인 것이다. 부르주아층이든 서민층이든, 기득권층이든 소수민족이든, 시쳇말로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힘이 없는 보통사람들은 거대한 체제, 불합리한 세상 같은 강력한 적과 맞서는 대신 축구장에서 싸운다. 축구가 없었다면 폴은 자살하거나 ‘묻지 마 살인범’이 됐을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채 때리고 차는 종합격투기는 오히려 동물적인 싸움이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를 재현한 것과 다름 아니라는 시각도 있지만, 싸움 자체만 놓고 보면 원초적이고 순수하다. 그에 비해 축구는 문명화되고 조직화된 싸움이다. 벌판에서 11대 11로 포메이션 짜놓고 벌이는 근대적인 전쟁의 게임 버전이다. 태클은 수비라기보다 공격이다. 사람을 골로 보낼 수도 있다. 볼은 축구가 싸움이 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예전 모 포털사이트에 올라왔던 ‘축구 부상 잔혹사’를 보면 웬만한 고어물 수준의 참상들이 나온다.) 축구의 오피셜 룰은 17조밖에 되지 않는다. 전쟁의 룰은 단순한 법이다. 전 세계에서 문명이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퍼져 있고, 오프사이드만 알면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는, 어느 스포츠보다 쉽고 보편적인 축구는 합법적인 대리전으로서 가장 적합한 방식인 셈이다.

제3자의 시각으로 볼 때, 예전 한일전에서 기성용이 일본 서포터들에게 선사한 원숭이 세리머니의 사연은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마찬가지다. 폴란드계 독일선수인 루카스 포돌스키가 폴란드전에서 골을 넣고도 고개를 파묻은 사연이나, 마라도나의 ‘신의 손’과 포클랜드 전쟁의 상관관계는 우리에게는 재미있는 드라마다. 폴의 인생이 우리에게 포복절도할 희극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처참한 흥행성적으로 고전하는 K리그에서 왜 수원과 서울의 더비만은 예외인가. 매번 서로 쌍욕과 인신공격을 주고받으며 싸우기 때문이다. 재미있다는 건 즉 상품화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축구에 대해서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고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들이대는 건 이상론이다. 차라리 까놓고 인정한 다음 즐기자. 축구와 폭력은 전선 속의 구리선처럼 얽혀 있다. 축구는 폭력의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P.S
1. 네이트에 연재되는 <제멋대로 성남빠>를 보시라. <피버 피치>의 한국판 웹툰 버전이다.
2. 요즘 박주영의 부진을 폴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저 자식 내쫓아버려!”일까, 아니면 “Park을 믿고 기다려줘야 해”일까. 후자였으면 좋겠다. 박주영의 행운을 빈다.


2011년 12월 2일 금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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