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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낙! <허트 로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 최승우 이메일


이를테면 전남편과 전처가 오스카를 두고 혈투를 벌였다거나, 할리우드 역사상 최초로 여성감독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거나, 또는 실패한 감독으로 치부되어 거의 잊혀져가고 있던 캐서린 비글로우의 완벽한 부활이라거나, 하여튼 이야깃거리가 넘쳐났던 올해 아카데미였다. 어쨌든 중요한 건 후자다. 캐서린 비글로우가 메가폰을 잡지 못한 7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재기했다는 것이다. <허트 로커>는 그녀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들의 특징이 완벽하게 집대성되고 응축된 작품이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또는 지금 그녀의 이름이 낯선 사람들을 위해서, 캐서린 비글로우의 행보와 주요 작품들을 한 번쯤 훑어볼 필요가 있다.

독특한 시각적 쾌감, <니어 다크>

캐서린 비글로우의 영화문법은 서사적이라기보다는 회화적이다. 캐릭터 창조나 이야기의 창의성에서 그녀가 비범한 능력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는 한때 촉망받는 화가였던 그녀의 과거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현대미술 고등교육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교 중 하나인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2년을 보내고, 컬럼비아 대학 영화학과에서 영화이론과 비평을 배웠다.

그녀의 캐리어에서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는 영화는 87년작 <니어 다크>다. 흥행에 실패했으나 비디오로 출시된 이후 컬트무비로 자리매김하며 캐서린 비글로우를 기대주로 격상시켰다. 국내에서는 <죽음의 키스>라는 괴상한 제목으로 개봉한 바 있는 이 영화는 뱀파이어물과 서부극과 느와르가 혼합되고, 록 밴드 탠저린 드림(Tangerine dream)의 음악이 시종일관 흐르는 어둡고 기묘한 영화다. 해가 지면 살인과 방화를 일삼으며 돌아다니는 뱀파이어 집단은 50년대 영화에서 유행했던 바이크 갱단과 흡사하며, 배경이 되는 미국 미드웨스트의 풍경, 경찰과의 대치장면 등은 서부영화를 연상시킨다. 뱀파이어로서의 설정은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햇빛을 접하면 죽는다는 것의 두 가지 핸디캡만이 부각된다. 특히 후자 쪽의 묘사―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뱀파이어가 총알로 생긴 구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때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장면 같은―는 강렬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 <블루 스틸>

캐서린 비글로우를 말할 때 ‘여성감독’이라는 점이 유독 부각되는 것, 페미니즘과 함께 언급되는 것에는 91년작 <블루 스틸>의 영향이 적지 않다. “도대체 왜 경찰 따위가 됐냐”는 남자의 비아냥에 매건이 “남자 처박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거나, 그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겨서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구타하는 아버지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벽에 처박는 장면 등은 페미니즘 진영이 아니더라도 꽤나 노골적인 파격이다. 결국 매건은 경찰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총을 들고 연쇄살인범의 응징에 나선다. 총은 흔히 폭력적인 남성성의 상징이다. (남성팬에게 강간당한 경험으로 만들어진 토리 에이모스의 <Me and a gun>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라!)

<블루 스틸>에서 캐서린 비글로우는 긴장감으로 관객의 숨통을 조이는 긴장감을 연출하는 것이 자신의 장기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매그넘의 푸르스름한 총신을 애무하듯 클로즈업하는 오프닝은 매혹적인 섹슈얼리티가 흐르는 장면이다. 제목에 걸맞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푸른 톤이 감싸고 있는데, 그 안에서 매우 터프한 액션이 전개된다. 여경 매건 터너 역을 맡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사이코 살인마 유진(론 실버)와 벌이는 도심 총격전의 클라이맥스는 스펙터클이나 속도감과는 거리가 먼 대신, 총성에 온몸이 얼어붙을 만큼 거칠고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물론 캐서린 비글로우는 차기작 <폭풍 속으로>를 통해 보다 화려한 액션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했다. 특히 서핑과 스카이다이빙 장면, 추격 신은 그야말로 다이내믹하다. FBI 요원과 은행 강도의 우정과 승부근성을 그린 일종의 버디무비 형식인 이 영화는, 다분히 마초적일 수 있었음에도 그녀의 손을 통해 세련되고 시원시원한 액션물로 태어났다. <폭풍 속으로>의 성공에 힘입어 캐서린 비글로우는 <천사의 동행>이라는 제목으로 잔 다르크에 대한 영화를 구상했다. 이 프로젝트에 뤽 베송이 투자자로 참여하는 대신에 캐스팅 자문의 권한을 얻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밀라 요보비치를 잔 다르크 역으로 추천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그러자 뤽 베송은 프랑스로 돌아가 독자적으로 <잔 다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격분했고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갔지만, 결국 살아남은 것은 뤽 베송의 <잔 다르크>였다.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만약 캐서린 비글로우의 프로젝트가 성사됐더라면 어떤 잔 다르크가 탄생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블록버스터의 연이은 실패, <스트레인지 데이즈>와 <K-19>

캐서린 비글로우는 89년 <어비스>를 찍고 있던 제임스 카메론과 결혼했다. 2년 뒤 이혼하고 나서도 둘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95년에 캐서린 비글로우는 제임스 카메론이 시나리오와 제작에 참여한 <스트레인지 데이즈>를 만들었는데, 도어즈(The doors)의 동명의 노래를 암울하게 리메이크해서 주제곡으로 사용한, 세기말 직전의 LA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SF였다.

이 영화는 차후에 재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개봉 당시에는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철저하게 실패했는데, 이는 제임스 카메론과의 공동작업을 한 탓이 컸다. 그의 상업적 감각이 반영된 시나리오는 캐서린 비글로우 특유의 어두운 무드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스트레인지 데이즈>는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한 영화 중 가장 손실이 큰 작품으로 기록되어있다. 결국 캐서린 비글로우는 전남편의 <아바타>를 제치고 오스카를 독식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악연이라면 악연일 수도 있겠다.

이 영화의 실패를 기점으로 캐서린 비글로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2000년 만든 <웨이트 오브 워터>라는 스릴러는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이질적인 시도로 끝났고, 2002년의 잠수함 블록버스터 <K-19>의 참패는 결정적이었다. 졸작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나치게 큰돈을 잃은 것이 문제였다. 1억 달러의 제작비가 든 <K-19>는 박스오피스에서 3,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쳤다.


그녀의 노하우가 응축된 영화, <허트 로커>

<허트 로커>는 강화복을 입은 폭탄전문가가 점점 더 강력한 폭탄을 제거해나가는 장면의 연속이다. 그 과정에는 캐서린 비글로우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들의 특징적인 스타일이 과잉 없이 응축되어있다.

그녀는 캐릭터 각자의 내면적 묘사나 정치적 입장 등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빼버렸다. 그 대신 효과적이고 조용하게 긴박감을 연출하는데 주력한다. 사실 폭탄이 터지는 한순간의 충격파를 제외한다면 이 영화의 모든 시퀀스는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미군과 이라크 저항세력들이 대치상태에서 저격용 망원경으로 서로를 살피며 벌이는 사막의 총격전은 단연 잊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다. 총알이 총구를 떠난 후 목표물에 맞기까지의 침묵은 그 어떤 화려한 서스펜스보다 강렬하며, 관객에게 큰 긴장과 아드레날린을 선사한다. 이쯤 되면 자신의 스타일을 어떻게 활용해야 극대화할 수 있는지를 아는 고수의 실력이다.

역경 뒤에 걸작이 탄생하는 경우를,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종종 보아왔다. <허트 로커>로 역전 홈런을 날린 캐서린 비글로우의 부활은 여러 의미가 있다. 일단은 그녀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돌아왔다는 것이고, 그녀는 그것을 <K-19>의 1/10에 불과한 저예산과, 스타급 배우 없이도 해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영화경력 30년을 돌아봤을 때, <허트 로커>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 글_최승우 월간 PAPER 기자(무비스트)    

26 )
loop1434
굳   
2010-07-02 19:16
dlcm1390
허트로커 재밌게는 봤었는데 개인적으론 카메라 흔드는게 인위적인 느낌이어서 상당히 거슬렸던 작품이었습니다.   
2010-05-18 09:52
withyou625
잘 읽었습니당 ㅎㅎ   
2010-05-15 03:33
mckkw
K-19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2010-05-05 15:09
skidoo9
캐서린 비그로우감독이 벌써? 30년 경력이군요. 시의적절한 영화 허트로커'가 그래서였든지 제법 문제작을 만들었나 봅니다.   
2010-05-03 10:10
smileuna
묵직함이 두근두근거리는 작품~   
2010-05-01 13:12
zota1365
기대 됩니다.   
2010-04-30 13:39
egg0930
정말 멋지네요   
2010-04-3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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