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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였고, 배우고, 앞으로도 배우로 살 것이다 <귀향> 이화시
귀향 |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 김도형 기자 이메일

김기영 감독의 옛날 작품들이나 최근작 <귀향>이나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이다.
다행이다.(웃음) 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변하는 건데 영화를 못한 한이 있어서 기어코 보여주고 말겠다는 생각 때문에 안 변한 것 같다.

갑자기 그만 두면서 한국을 떠났는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다.
계속 하고 싶었다. 정말, 정말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안변하고 그나마 옛날 모습하고 비슷한 것도 그 한 때문이다.(웃음) 하루도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언제나 나는 배우였다, 배우다, 배우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슬픈 현실이다.

<귀향>에서 모습을 보니 반가운 생각이 들더라. 오랜만에 국내 작품에 출연하니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좀 당황스러웠다. 세월이 지나는 일이니 누구나 그렇게 느꼈을 거다. 사실 1,2년만 지나고 다시 나와도 생경한 느낌일 텐데, 시간을 너무 많이 건너뛰었다. 그나마 가능했던 것이 언제나 마음속으로 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선경 감독이 신인이지만 재능이 많다. 어떻게 보면 김기영 감독하고도 비슷한 독특함이 보인다.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그로테스크하고 불편한 부분이 좋았다. 이미 그런 작업에는 충분히 중독이 되어 있었으니까. 내 얼굴에 험한 칠을 마구 했는데도 즐길 수 있었다.(웃음)

그동안 여러 섭외가 있었을 것 같은데, 복귀작으로 <귀향>을 선택한 이유는?
구체적인 것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얘기는 있었다. 사실 <귀향>도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아직 내가 작품에 돌입하기엔 좀 이른 게 아닌가 싶었는데, 임연숙 프로듀서가 워낙 적극적이었고, 작품을 읽어보니 나랑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뮈 작품을 모티프로 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예전 처녀 때 <이방인>을 읽고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며 깊은 영감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 성향이 작품에도 잘 나타난 것 같다. 임연숙 프로듀서랑 안선경 감독이 찾아와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니 이 작품에서 과거 이화시의 팜므파탈적인 느낌도 낼 수 있겠다 싶었다.

타이밍이 잘 맞았나보다. 그때도 캐나다에 있던 시절 아니었나?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차 왔다가 촬영까지 하게 됐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 임연숙 프로듀서가 날 데리고 바로 강원도 상동으로 가서 촬영이 시작됐다. 근데 거긴 정말 아름다운 촬영지였다.
젊은 배우들 주축이었는데,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박지아 씨(지아), 박상훈 씨, 특히 박상훈 씨는 탤런트 박근형 씨 아들이잖나. 분위기가 너무 좋고, 작품에 임하는 자세가 좋았다. 박지아 씨는 내가 <숨>을 외국에서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예뻤다. <귀향>에서는 아름다운 모습뿐 아니라 연기까지 신들린 듯해 옛날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더라.

안선경 감독이 젊은 시절의 이화시를 보고 바로 어머니역에 캐스팅할 정도로 두 사람은 비슷한 이미지다.
영화에서 나중에 성녀(지아)가 엄마 옷을 입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순간 내가 저런 장면도 찍었나? 했을 정도로 비슷하더라. 가만 보니 박지아 씨였다. 감독들의 성향도 김기영, 김기덕, 두 사람 다 약간 좀 그렇잖아?(웃음) 기묘한 느낌이 든다.

박상훈을 제외하면 주요 스탭이나 배우들이 거의 다 여자다. 현장 분위기가 좀 남다르지는 않았나?
우리 아마조네스들?(웃음)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선경 감독이 가끔, 워낙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감독들 누구나 그렇지만, 이해 못할 행동을 좀 하고 그러기는 했는데 스스로 잘 빠져나오고 그랬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김진아 감독의 <두 번째 사랑>에 출연했었다. 어떻게 캐스팅된 건가?
그때는 김영진 교수 덕분이었다. 김기영 감독이 1차로 날 데뷔시켰다면, 김영진 교수가 2차로 날 발굴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주간지 FILM2.0에서 행방이 묘연한 70년대 전설의 배우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나를 거론했고, 그걸 김진아 감독이 보고 지인을 통해서 날 캐스팅하게 된 거다. 처음에는 고민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것 같다. 할리우드 작업 스타일을 보게 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거긴 촬영을 하면 일대가 전부 세트장이 된다. 이쪽엔 식당, 이쪽엔 의상, 이쪽엔 또 쉴 공간 등 수 십대의 트럭이 들어와서 브룩클린 한 지역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김기영 감독과 계속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두 사람의 코드가 맞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코드에 내가 들어간 거지. 처음 데뷔시켜주고 연기 지도해주고 했으니 김기영 감독의 색깔에 물들 수밖에. 그러고 나니 다른 작품은 양이 안 차는 거다. 독특해야 연기 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 전부터 김기영 감독을 좋아했었나?
고등학교 때 <충녀>라는 작품을 봤다. 당시에는 외국영화를 주로 보고 한국영화를 보면 유치하다고 하던 시절이었는데, 동도극장에서 <충녀>를 보고 놀랐다. 그때가 17, 18살 정도였는데, “한국에도 이런 영화가 있구나, 이런 감독이 있구나” 싶었다. 윤여정 씨, 전계연 씨 머리를 끌고 내려오고, 부부가 밥 먹는데, 한 번 성관계를 가진 가정부가 바로 ‘여보’ 이런 소리를 하니까 얼마나 무섭나. 그렇게 그 집안이 깨져버리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 옛날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있다. 한 번 남자한테 모든 것을 허락하면 그 남자랑 결혼해야 하고 영원히 내 남자라는 생각. 영화 속에서는 그 순진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렸을 때 남자가 받는 어마어마한 대가, 즉 가족의 파멸을 그리고 있다. 나도 그런 보수적인 정서가 체질화되어 있어서 나이가 들어도 쉽게 바뀌지 않더라. 겉보기엔 내가 좀 오픈 된 건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웃음)

지금 봐도 <충녀>는 무서운데, 어린 나이에 봤으면 더 충격이었겠다.
특히 윤여정 선배의 연기가 대단했다. 약간 미치광이 같기도 하고, 모자란 것 같기도 하고, 천재인 것 같기도 한 그 연기. 그래서 지금도 윤여정 선배를 존경한다.

참 대단한 감독이었는데 너무 뜻밖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 해서 많이 놀랐겠다.
김기영 감독의 괴벽이나 그런 것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혼잣말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파계>를 촬영할 때, 당시 촬영장에 화장실을 만들어 전체 스탭이 다 같이 썼다. 아침마다 줄을 서서 볼 일을 보는데, 화장실에서 소리가 나더라. 웅얼웅얼 하다가도 또 화를 내듯 큰 소리도 나고 미친 사람처럼 이상한 말도 하고 꼭 신 내린 것 같았다. 김기영 감독이었다. 그래도 나올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근엄하게 나오더라.(웃음) 그래서 저 분은 머릿속에 뭔가 다른 게 있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또 어린애처럼 순수한 면도 많았다. 술을 못 하고 담배도 안 피웠는데, 나중에는 멋으로 좀 피우더라. 폼이라도 히치콕처럼.(웃음) 하여간 온통 영화만 생각하던 그런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시대를 앞서간 작품을 찍었겠지만.

<귀향>을 찍을 때 안선경 감독은 어땠나? 남다른 감독이었나?(웃음)
안선경 감독도 정말 물건이다. 자기 생각이 확실하고 강해서 때로는 넘치기도 한다.(웃음) 그건 또 다듬어지겠지. 감독한테 자기 고집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그런 걸 좋아한다.

신인 감독이지만 강한 캐릭터라 트러블이 있었을 것도 같은데.
촬영할 때는 감독의 요구들을 수용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감독이 어떤 장면을 찍을 때 어떻게 해야 감독 마음에 들까를 고민한다. 감독은 정말 하얀 도화지에 하나하나 모든 것을 그려가는 역할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게는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라는 인식이 강해서 팜므파탈과 같이 강한 캐릭터만 생각하는 것도 같다. 부담은 없나?
그런 캐릭터를 원해서 찾는 감독들도 있다. 부담은 없다. 어차피 배우는 자기 캐릭터가 있기 때문에 내겐 그런 이미지가 있는 거다. 앞으로 부드러운 역할도 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원하고 나도 거부감은 없다. 내 이미지랑 맞아서 맡기는 역이라면 자연스럽게 할 생각이다. 근데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하니까 주연보다는 조연 쪽 요청이 많은데, 조연 역시도 분명한 색깔과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평범한 가정의 어머니 역할이라도 항상 “밥 먹었니?”, “결혼해야지?” 이런 말만 하지 않는다. 요즘 50대나 40대도 그들만의 목적이 있고 고민도 있다. 나이 든 역할이라고 부드럽고 평범할 이유는 없다. 표현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영화 속의 강한 이미지가 실제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나?
비슷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최근에는 고민이 많아졌다. 못다 이룬 것들이 많아서 한이 됐나 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거다. 다시 인터뷰를 할 때 또 다른 모습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야 할 테니까.(웃음)

김기영 감독 작품이 흥행작도 아니었고 당시에도 문제작이 많았다. 다른 흥행작들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나?
계약 기간이 있어서 할 수가 없었다. 5년 계약이어서 5년간 다른 영화는 물론 연극, TV, 광고 등도 못했었다. 특히 화장품 모델 섭외가 들어왔는데 못하게 하더라. 당시 화장품 광고는 영향력이 엄청나던 때였다. 아마도 그때 그 모델을 했었더라면 유명인사가 돼서 지금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아는 영화인들만 알아보는 수준이지만.(웃음)

홀연히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살았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충실하게 아이들 키워서 학교 보내면서 평범하게 살았다. 외국 생활은 시간이 많다. 어울릴 수 있는 커뮤니티는 있지만 한국처럼 동창이나 친정이나 이런 것과는 달라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했다. 영화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 옛날에 <그릭 타이쿤>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안소니 퀸이 나오는 선박왕 오나시스에 관한 영화였다. 거기서 마지막에 안소니 퀸이 검은 실루엣으로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그 춤에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 재산 이런 것들보다 안간 자체에 대한 감상이 묻어나는 표현이 있다. 나한테 굉장히 강하게 각인된 장면인데, 최근에 <마더>에서 김혜자 씨가 춤을 추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더라. 나중에 내가 영화감독이 되거나 시나리오 작가가 된다면 그런 걸 해보고 싶다. 마음에 있는 것들, 머릿속에 심어놓은 것들을 바탕으로 더욱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해보고 싶다.

넘치는 에너지를 꾹꾹 눌러가며 캐나다에서 조용히 생활했을 걸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하다.(웃음)
그런 시간에 머리나 마음에 여러 생각들을 집어넣었다. 또 우리 딸이 영화 연출을 공부하는데, 덕분에 10분, 15분짜리 단편 3개를 찍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주연을 한 작품이 있는데, 롱테이크로 10분을 그냥 찍기도 했다. 미친 여자가 남편을 기다리는 장면인데 다 찍고 나니 우리 딸이 “엄마 분위기 아직 죽지 않았어”그러더라. 속으로 끄덕이며 “한국 기다려라, 내가 간다” 그랬지.(웃음)
캐나다에 있을 때도 우리 영화는 꾸준히 봤나?
한 때는 영화가 날 실망시켜서 좀 피했다. 정이 가는데 일부러 덮어두고 있는 그런 기분. 마음이 아프다기보다 덮어두고 있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보자기를 확 펼쳐 주리라 마음먹고 있다. 그래도 문제작이나 뭐 이런 유명한 작품들은 챙겨보는 편이다. 옛날에는 영화마다 편차가 심했는데 요즘 영화들은 비슷비슷하게 다 좋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현장 경험도 있지만, 영화만큼 성취감이 큰 작업도 없는 것 같다.
영화를 한 번 하면 마약과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나. 여기에 발을 딛고 맛을 보면 다른 데서 다른 일을 하다가도 다시 이쪽으로 오고 싶어진다. 스탭이나 배우 모두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 번 들어오면 못 빠져나가는 수렁이지.(웃음) 나가려고 힘쓰면 더 빠지는 수렁.(웃음)

나이 들면서 개성이 사라지는 배우가 많은데 꾸준히 자기 색깔을 유지하며 묘한 매력을 보여 준다. 눈빛이나 분위기는 타고난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끼가 있었나?
이런 말하면 내 자랑 같아서 말하기 부끄러운데.(웃음)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눈이 까맣고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으로 월출산 밑에서 자랐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에서 굉장히 멋있게 생긴 선생님이 전근을 왔다. 당시에는 그 선생님이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나한테 그러더라. “너는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생겼니? 커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 가슴을 울리려고?” 어려서도 나한테 그런 끼가 있나보다 했다.(웃음)

그럼 어려서부터 배우의 꿈을 키웠었나? 유년시절에는 어땠나?
어려서부터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공해서 우리 가정을 빛내고 싶었고, 마을을 빛내고 싶었다. 항상 월출산을 보면서 “월출산아 내가 널 빛나게 해줄께”라며 다짐도 했다. 어려서부터 꿈을 크게 꾼 거지. 집에서도 장관 부인은 되라고 했다. 김기영 감독에게 주연으로 발탁될 때만 해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눈에서 나온 빛이 저 멀리까지 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근데 하나님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나보다.(웃음) 하지만 꿈은 계속 꾸는 자에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제 애들도 다 키웠으니 전력으로 질주할 거다. 반드시 월출산을 자랑스럽게 해줘야지. 그게 10년 후든, 20년 후든 꼭 이루고 싶다.

가족들은 어떤가? 이런 방면으로 끼가 좀 있었나?
전혀 아니다. 오빠들은 어디 가서 노래도 못 부를 정도다. 막내라서 예쁘다 귀엽다 해준 것 같다. 또 이런 쪽은 자기 개발이라고 생각한다. 남과 달라지고 싶은 욕망 같은 것. 근데 당시에는 부모의 반대가 많았다. 계속 못하게 바로 결혼시키고 그랬던 거지. 언니나 부모가 조금이라도 더 밀어줬더라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됐던 아이들 다 키우고 지금이라도 다시 나와서 연기하고 인터뷰 하고 하는 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영화 작업만 할 생각인가? 과거에 TV에 출연한 적도 있었는데.
기회가 되면 다 할 생각이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즐겁다. 과거에 나왔던 TV는 단막극이었는데, TV쪽은 굉장한 숙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화랑은 또 다른 시스템이니까. 홈그라운드니 아직은 영화가 좋지만 연기라면 가리지 않을 거다.

이제 거의 영구적인 귀국을 했으니, 영화나 TV 등에서도 자주 볼 수 있겠다.
왔다 갔다 하면서 촬영하니 몰입이 안 되더라. 영화를 찍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인데 촬영 있을 때만 왔다가 찍고 또 다시 날아가고 이런 건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열심히 해도 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그런 식은 미안하지. 그래서 이제는 더 많이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다음 작품 때문에 미팅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들었다.
가제가 <간증>이다. 종교적인 냄새가 약간 풍기는 작품인데 여기서는 주인공을 맡았다. 장년의 남녀가 사건에 얽히는 그런 내용이다. 거기서도 약간 팜므파탈적인 느낌을 낸다. 곧 촬영도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안 쉬고 계속 작업할 생각이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심사도 해봤지만 영화 아카데미, 진짜 무서운 학교다. 놀라운 사람이 많다. 그래서 영화 아카데미라면 무조건 오케이다.(웃음) 같이 얘기하고 이런 것들도 다 즐겁다. 이번 작품도 역시 아카데미 작품이다. 또 이런 젊은 친구들이 5년, 10년 뒤에는 한국영화판 장악할 테니까 미리 잘 보여주는 거다.(웃음)

곧 촬영 시작이라고? 이제 진짜 안 쉬고 계속 작업할 모양이다.
11월 23일 크랭크 인을 한다. 19~20회차 정도로 촬영할 계획인데, 완성되면 내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분에 나갈 것으로도 보인다. 이번에 부산에서 영평상 시상하면서 김동호 위원장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 다음에는 시상이 아니라 수상하러 오겠다고. 연기를 잘해서 상 받는 게 제일 부러운 일이다.

많은 출연으로 얼굴도 많이 보여줘야 젊은 친구들도 좀 알고 할텐데.
사람들이 많이 알 수 있게 도와 달라.(웃음) 눈에 빛이 나는 나이 먹은 ‘여자’가 있다는 것을.(웃음) 오늘 인터뷰 너무 즐거웠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20 )
ooyyrr1004
네 그렇군요   
2009-11-04 09:21
kwyok11
배우   
2009-11-04 07:51
ehgmlrj
저두요..;;   
2009-11-04 00:58
seon2000
잘 봤어요   
2009-11-0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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