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화신은 이제 그만
<인어 아가씨>의 아령과 <아내의 유혹>의 은재는 둘 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드러낸 인물이다. 이 두 인물을 통해 장서희는 시청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의 히로인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 악녀 이미지도 덧씌워졌다. 그는 “두 드라마를 하고 나서 복수극을 소재로 한 일일드라마 시놉시스는 다 받아봤다”며 “아령과 은재 캐릭터가 참 고맙지만, 평생 그 역할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나. 이제 탈피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가면을 벗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한 장서희는 2010년 두 작품을 만난다. 하나는 드라마 <산부인과>였고, 또 하나는 바로 영화 <사물의 비밀>이었다. <산부인과>에서 그가 연기한 서혜영은 겉은 차갑지만 누구보다도 환자를 생각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악에 바쳐 살아가는 아령과 은재와는 확연히 달랐다. 장서희는 심기일전해서 출연한 <산부인과>를 자신의 새로운 연기 패턴을 보여줄 수 있었던 고마운 작품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사물의 비밀>도 <산부인과>만큼 신나게 연기한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사물의 비밀>에서 신나게 연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름 아닌 마흔 살이란 나이. 장서희의 실제 나이와 같은 여교수 혜정은 그동안 맡았던 캐릭터들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10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왜 벌써 마흔이냐고’하는 극중 대사는 혜정의 푸념이자 장서희의 푸념처럼 들린다. 그는 “40이라는 숫자가 주는 세상의 선입견이 싫었다”며 “40대 여배우라고 해서 하고 싶은걸 못하게 되는 현실을 원망한다”고 말했다. 연출과 각본을 담당한 이영미 감독도 장서희와 같은 40대 여성이다. 그가 쓴 시나리오에 흠뻑 취한 장서희는 흔쾌히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이영미 감독은 극중 혜정이 발칙하면서도 맹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기를 원했고, 악녀로 대변되는 장서희가 혜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해 연기를 이끌었다.
40대의 감성멜로를 지향하는 <사물의 비밀>은 보일듯 말듯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혜정과 우상(정석원)의 이야기다. 특히 소파에서 나누는 키스 장면은 이를 잘 표현했다. 장서희는 “끈적끈적하지만 순수함을 지닌 영화”라며 감성적인 부분과 에로틱함이 잘 배합됐다고 말했다. 과연 실제 이런 상황이 장서희에게 닥친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 그는 “실제 스무 살 연하남과 사랑에 빠진다면 생각만 해도 좋지만, 혜정이처럼 고민이 먼저 앞설 것 같다.”고 속내를 밝혔다.
40대의 아름다움, 그리고 중국
인터뷰 내내 빼놓지 않고 나온 숫자는 40이었다. 올해로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된 장서희는 연륜이 느껴지는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연륜이라는 말이 40대 여배우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 같아서 싫다고 했다. 그는 “40대든 50대든 나이에 맞는 감성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에서 <사물의 비밀>이 잘돼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마흔이란 나이를 내세우면서 감성 멜로를 보여주는 건 국내 영화계에 흔치 않다.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와서 40대 여배우들의 활동반경이 넓어졌으면 한다.”
장서희는 국내를 넘어 중국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인어 아가씨> <아내의 유혹>이 중국에서 방영된 후에 중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배우가 된 장서희는 최근 중국에서 드라마 <서울 임사부> 촬영을 끝냈다. <서울 임사부>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제작된 작품으로 한국여자와 중국 요리사가 국경을 넘나들며 사랑하는 이야기다. 연이어 제작비 500억 원이 투여되는 대하 사극 드라마 <수당영웅>에 캐스팅되면서 중국활동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수당영웅>에서 장려화 역을 맡은 그는 “수나라 황후였다가 나라가 몰락해 복수를 행하는 무서운 여자”라면서 “싸움도 하고, 복수를 위해 남자를 유혹하는 등 팜므파탈의 성격이 강하다”고 캐릭터를 설명했다.
장서희는 20대 때 주인공을 받쳐주는 조연을, 30대에는 복수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악녀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그가 40대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예전 <무릎팍 도사>에 나갔을 때 보여줬던 모습이 진정 나의 모습이다”라며 “작품에서도 예능에서 보여줬던 솔직한 본 모습으로 변신을 꾀하고 싶다”고 포부를 다졌다. 이제 그에게서 악녀의 이미지는 잊어도 좋다. 대신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여배우의 모습을 기억하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한 욕심 많은 여배우로 말이다.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1년 11월 14일 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