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지난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관객을 찾는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교포 가정의 막내딸로 태어난 양영희 감독은 위로 세 아들을 북한에 보낼 정도로 북측 정부를 열렬하게 믿고 지지했던 부모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찍은 <디어 평양>(2006)과 북한에서 태어난 조카를 주인공으로 한 <굿바이 평양>(2011),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한 감독은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제주도 4·3의 상흔을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한 채 살아온 어머니였다. 가족 3부작의 완결에 해당하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찍으며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용기 있는 그 삶을 존경하게 됐다는 감독을 만났다. 26년간 작업하며 그 어떤 순간도 인위적으로 개입하거나 연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극 중 어머니는 딸과 사위와 함께 70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한다. 조선국적자로서는 드물게 대한민국 입국이 허용됐다는 설명이 따른다. 생경한 사실이다.
정확한 명칭은 (아마도) 조선적(기자 주: 일본국적도 대한민국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하는 행정상의 분류)이다. 경우마다 다른데 대체로 한국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다. 2018년은 ‘제주 4·3’(1948) 70주년이라 쉽게 여권이 나왔다. 처음 찍을 무렵 어머니는 치매 초기였고, 그때만 해도 어머니의 알츠하이머가 이렇게 진행이 빠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제주도 방문은 우리 가족의 목표같이 돼 버렸다. 2004년 40대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후, 자유롭게 한국과 일본에 오간 나와 달리 어머니와 일본인인 남편(기자 주: <수프와 이데올로기> 아라이 카오루 프로듀서)은 첫 제주도 방문이었다.
긴 시간을 담았을 텐데, 촬영을 시작한 시점과 마무리한 시점은.
10년간 찍었다.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010년부터 오사카와 도쿄를 오가며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간 나는 결혼했고, 어머니는 평소에 반대하던 외국인 사위를 맞았다. (웃음)
제주 4·3을 겪은 어머니의 과거를 알고 찍기 시작한 건가.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잘 몰랐고, 잠시 머문 정도로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원래 가본 적도 없다고 하셨었다. (웃음) 처음 ‘제주 4·3’을 알게 된 건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1997년이다. 당시 교수님이 학살이 있던 섬이라고 소개하길래, 5·18 민주항쟁과 착각한다고 생각해서 반문하니 아니라고 한번 알아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께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1942년 오사카에 왔으니 경험자는 아니다. 어머니는 오사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당시의 어머니가 처한 상황과 경험을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점이 돋보인다.
어머니는 제주도에 잠깐 머물렀고, 좋은 기억은 없는 곳이라고 표현했었다. 당시의 기억을 마음속 깊이 숨겨 자물쇠로 꽁꽁 잠가 놓고 살아서 새삼스럽게 꺼내어 기억하는 걸 힘들어하셨다. 단지 묻지 말라고, 이야기하면 큰일 난다고 했을 뿐이다. 조총련을 지지했던 부모님은 아들을 북한에 보냈고, 본인들도 매번 북한을 다녔으니 한국의 변화에 대해 잘 몰랐다. 민주화됐다는 걸 말과 머리로는 인식하지만 체감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등 재조명을 위해 여러 검증과 조사,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그제야 조금씩 얘기하기 시작하셨다. 너무 오랫동안 묻어둔 기억이라 단편적인 데다 어머니의 말을 통해 직접 전달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다.
어머니의 제주도 방문에 앞서 ‘제주 4·3 연구소’ 관계자가 먼저 오사카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은 어머니 기억의 집대성 같은 인터뷰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잡히지 않은 분까지 정말 여러분이 방문해서 3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의 지명과 인명 등 질문이 매우 구체적이라 어머니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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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하면서 장편으로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할 무렵, 마침 ‘남편’ 이라는 아이템이 더해졌다고. (웃음)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나,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머니가 조금씩 과거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4·3 당시 약혼자가 있었고, 화를 피해 어린 두 동생과 오사카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우 파편적인 증언의 기록이라 촬영을 시작한 지 4~5년 될 무렵에 장편으로 만들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단편 혹은 조카들을 위한 기록 영상으로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촬영을 이어가던 중 내 인생에 이상한(?) (웃음) 일본 남자가 등장했다. 남편이 (영화에) 들어오면서 내 작업은 한결 수월해졌고, 어머니와 사이도 훨씬 좋아졌다. 그전에는 크고 잦은 (말) 다툼도 있었는데 (웃음) 남편이 어머니와 나 사이에 쿠션 역할을 해줬다.
‘이상한’이 아니라 자상한 아닌가! (웃음) 남편은 매우 살갑고 살뜰히 어머니를 챙기던데.
어머니 또한 나보다 남편에게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더라. 남편은 프리랜서 기자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극 중 모습처럼 우리 집에 처음 인사 온 후 4·3에 관한 책과 자료 등을 열심히 찾아서 읽었고,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질문하곤 했다. 장편 영화를 목표로 찍기 시작한 건 2016년부터다. 어머니는 남편의 첫 방문에 닭백숙을 정성껏 끓여 주셨다. 이후에는 조리법을 배워 남편도 어머니를 위해 끓였다. 제목의 ‘수프’란 바로 이 닭백숙이다. 남편이 ‘식구’의 일원이 되는, 새롭게 가족이 구성되는 모습을 남편을 인터뷰어로 하는 형식으로 만들 수 있겠더라. 덕분에 어떨 때는 나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기만 하면 됐다.
어머니의 과거가 당신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으며 생각의 변화가 있다면.
영향이 컸다. 이전까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북측 정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순수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아들 셋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니, 그러니까 2차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을 피해 가본 적도 없는 부모님 고향인 제주도로 갔다가 그곳에서 4·3을 경험하고 다시 오사카로 피난 온 것 아닌가. 이런 엄청난 사건을 10대 소녀가, 그것도 어린 두 동생을 건사하면서 겪어냈다는 데 놀랐다. 정말 용감한 분이라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이 생겼다. 동시에 스스로 많이 겸손해졌다.
겸손함이라면.
‘우리 엄마와 아빠는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해서 말하는 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는 것, 가족이라고 다 아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우쳤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북한에 있는 동생, 자식과 손자를 위해 돈과 물건 등을 힘든 상황 속에서 끊이지 않고 보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시간을 거쳐온 사람은 울 시간도 없어서 웃는다는 생각이다. 너무 힘들어서도 그렇고, 스스로를 고무하기 위해서도 웃는다. 그 정신력이 정말 대단하지 않나.
알츠하이머가 심화되면서 어머니는 왕왕 망각에 빠진 모습이다. 아버지 등 가족이 곁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된 후 보고 싶은 가족과 다 같이 산다는 망상 속에 살고 있을 때가 많다. 그토록 열성적이고 왕성하게 정치·사회 활동을 해왔음에도, 평양과 북송이라는 단어에 별반 반응하지 않는다.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산다는 게 잔인한 현실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 매우 평화로운 시간이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작품 계획은.
가족 다큐멘터리는 <수프와 이데올로기>로 종지부를 찍었다. 다만, 카메라 뒤에서 더 솔직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해서, 못다 한 이야기는 ‘카메라를 끄고 씁니다’라는 산문집에 풀어냈다. 다큐멘터리, 그러니까 논픽션으로 그릴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정말로 잔인하고 복잡한 이야기는 알고 있어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극 영화로 만들려고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한일 관계가 경색됐는데 작품 활동에는 영향이 없는지.
창작자로서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한일합작으로 만들었다. 음악, 영화 등의 문화·예술은 국적에 상관없이 더욱더 긴밀하게 교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2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이번 다큐멘터리의 편집 작업을 했고, 앞으로 한국에서 더 많은 작업을 하고 싶다. 계획 중인 극영화 역시 한일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지키고자 하는 원칙이나 철학은.
26년간 찍었지만, 단 1초도 이렇게 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개입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어떤 식으로든 지시하는 연출은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또 머리로는 이렇게 저렇게 시뮬레이션하지만, 출연자에게 이를 요구하는 건 어떻게 보면 폭력이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타인의 사생활에 카메라를 밀착하는 순간에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꾸며서 들어간다면, 관객이 아마도 다 알 것이다. (대상과 관찰자의) 관계성과 공기가 카메라에 다 담기기에 그렇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무섭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질문이다. 양영희는 어떤 사람인가.
솔직한 사람! (웃음) 어리고 아기 같은 면이 있다. 사실 솔직하면 주변과 마찰이 생기고 어른답지 못하다고도 하지만, 그럼에도 어른이 되는 걸 거절하는 유치하고 솔직한 사람이다.
사진제공. ㈜엣나인필름
2022년 10월 25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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