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해당 인터뷰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정이>가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시청률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 기준으로 전 세계 1위에 올랐다.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한국 작품이 잘될 때 기분이 좋더라. 솔직히 <정이>가 이렇게까지 잘될 줄 몰랐다. (웃음) 많이 봐주시고 좋아해주셔서 기분이 좋다. 감독님, 김현주 선배님과 헛되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정이>는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최고의 용병 ‘정이’와 그의 딸 ‘서현’(강수연)이 중심이 된다. 해외 관객들은 특히 ‘정이’와 ‘서현’의 드라마에 좋은 평가를 보내고 있다.
미국은 특히 오래 전부터 SF 영화가 발달하지 않았나. 그래서 (<정이>가) 미국에서도 1위를 했을 때 놀랐다. <정이>는 마치 SF 단편 소설 같은 이야기다. 거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보다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그 점이 해외 관객에게 흥미롭게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그런가 하면 한국 관객들 사이에선 ‘신파성이 짙다’는 반응도 나왔다. ?
관객이 영화에서 신파를 느꼈다면, 그 의견 또한 맞다고 생각한다. 영화나 배우는 관객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관이다. 맛집이라고 알려진 음식점도 막상 직접 가보면 입맛에 안 맞을 수 있지 않나. 그런 것처럼 영화도 당연히 살아온 환경에 따라,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중 ‘정이’ 프로젝트 연구소장 ‘상훈’ 역을 맡아 군수 AI 개발 회사 크로노이드의 회장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어떻게든 ‘정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자 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상훈’이라는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겉모습은 어려 보이는 반면, 직책은 높기 때문에 신뢰 가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회사에서 부장님이 웃기지 않은 개그를 해서 힘들게 한다고 하지 않나. (웃음) 우리가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봤더니, 뭐든지 과하게 하는 사람이더라. ‘상훈’을 보고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캐릭터를 구축하고 싶었다. 그러면 관객이 ‘상훈’이 인간이 아닌 걸 알았을 때 받아들이는 게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에서 고 강수연 배우, 김현주 배우 등 대선배들과 함께 작업했는데.
평소에 내가 좋아하고 따르고 싶은 사람들은 결국 세대나 나이를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분들인 거 같다. 그래서 솔직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던 것 같고. 사실 처음에는 부담감이 컸다. 특히 강수연 선배님은 오랜만에 복귀하셨는데 필모그래프만 봐도 내 또래 배우들과는 접점이 없지 않나. 영광인 한편 절대 누가 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수연 선배님과의 첫 만남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선배님 앞에서 떨면서 술을 마시다가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났는데 문 밖에서 ‘쟤 너무 괜찮다. 너무 매력 있다’ 이런 소리가 들리더라.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웃음) 오래 활동하셨고 너무 대단한 업적을 남긴 배우셔서 까다로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선배님은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다. 인간적으로나 연기적으로 내가 더 놀 수 있게 편한 현장을 만들어 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현장에서도 감사하단 말을 많이 했지만 작품이 공개된 이후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안타깝다.
작품을 하면서 강수연 선배님, 김현주 선배님, 그리고 연상호 감독님과 넷이서 모임을 자주 가졌다. 모이면 오디오가 비지 않았다. (웃음) 작품의 결과보단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편인데 이번 작품은 그런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작품이다. 현장에서 즐겁게, 웃으면서 촬영했고 어떠한 강요 없이, 행복하게 서로를 배려하면서 만드는 과정이 좋았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 결과가 조금 아쉬워도 다시 만나고 싶고 연락하게 되는 거 같다.
연상호 감독과는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이다. 넷플릭스 <지옥>에서 새진리회 행동대장 유지 사제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뒤 <정이>에 이어 연 감독의 차기작 <선산>까지 출연하게 됐다.
<지옥> 후시 녹음을 할 때 연 감독님이 <정이> 얘기를 꺼내셨다. 대본도 안 보고 무슨 역할인지도 모르는데 일단 하겠다고 했다. (웃음) 이렇게 큰 역할을 맡을지 상상도 못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이 정도로 규모 큰 대작에, 어마어마한 대선배들과 내가 함께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더라. <지옥>의 유지 사제는 표현을 절제하다가 마지막에 무너지면서 폭발하는 캐릭터였다. 당시 내가 주변 눈치를 안 보고 캐릭터에만 몰두했는데 그런 면을 보고 나를 다시 불러주신 게 아닌가 싶다. ‘상훈’은 더 눈치 안 보고 표현하는 캐릭터니까. (웃음)
원래 리얼리티 장르를 좋아했는데 연 감독님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연기의 매력 중 하나가 일상에서 겪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 아니겠나. <정이>나 <지옥>에서는 내가 살아볼 수 없는 인생을 살아봤다. 감독님의 세계관은 무언가 뒤틀린 것 같을 때도 있고 캐릭터도 흥미로우니까 평소에도 관심이 컸는데 감사하게도 세 작품이나 함께하게 됐다. 연 감독님이 아니라면 내가 언제 또 이런 장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연상호 감독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 같다.
일단 연상호 감독님과 유머 코드가 잘 맞다. 감독님이 액션 담당이라면 나는 리액션 담당이다. 내가 잘 웃어서 많이 불러주시는 것도 같다. (웃음) 연 감독님의 현장은 정말 재밌고 좋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기대가 된다. 감독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걸 떠나 연상호라는 인간 자체의 분위기, 촬영장의 분위기, 일자리의 환경이 너무 좋아서 어떤 역할이든 하겠다고 한 것 같다.
연 감독뿐만 아니라 김현주 배우와도 <선산>에서 함께한다. <지옥>, <정이>에 이어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만큼 편안하고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반대로 동일한 조합 안에서 전에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모습을 끄집어내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
연달아 같은 사람들과 호흡하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고민이 많아질수록 더 열심히 하게 되고 흥미로운 것들이 늘어나는 거 같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두 분과 계속 같이 작업하고 싶다.
지난해 영화 <대무가>, 시리즈 <지옥>을 포함해 6편의 영화와 시리즈에 출연했다. 이동욱, 김소연 배우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구미호뎐 1938>가 오는 5월 공개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도 <선산>을 비롯해 여러 작품들에 참여하고 있다.
예전엔 평범하게 생긴 얼굴이 단점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강점이라고 느껴진다. 내가 좀 심심하게 생겼지 않나. (웃음) 그래서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친구처럼 아주 일상적인 역할부터 강렬한 캐릭터까지 다양하게 맡을 수 있는 거 같다. (웃음)
사진제공_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