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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오늘 <오늘> 이정향 감독
2011년 10월 26일 수요일 | 유다연 기자 이메일


Q. 오랜만이다. 그동안 뭐했나?
머릿속에서 계속 이번 작품 <오늘>에 대한 의무감과 중압감이 있었다. ‘써야 된다, 써야 된다…’ 이런 식으로, 작품이 한시도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강박관념 때문에 꿈도 꿨다니까.

Q. 어떤 꿈?
내가 <오늘>을 통해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이미 다른 사람의 책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이야기 돼버린다는 내용이었다. 내 작품이 물거품이 되니, 난 꿈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괴로워했지. 내가 좀 작은 일에 소심하고 큰일에 대범한 스타일이다. (웃음)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긴, 이건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겠다고 처음부터 예감한 작품이기도 했다.

Q. 그래도 그렇지, 9년은 너무했다.
<집으로...>를 끝낸 후 2년 정도는 쉬었다. 그리고 2005년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오늘> 작업에 들어갔다. 그간 계속 작품을 생각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늘어난지라, 애초에 구상했던 것만으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 보니, 이거 쉽지 않겠구나 싶었고.

Q. 그러게, 시나리오 작업도 고됐다며. 얼마나 걸려서 썼나?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썼으니까 한 5년을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원래 독서를 잘 안하는데, 그 기간 동안 평생 읽을 책을 다 읽은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들 내가 으레 독서가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미안해 죽겠다. ‘내 인생의 책 한 권’ 같은 테마로, 방송 출연 요청이나 글 청탁이 종종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내가 책을 잘 안 읽는다고 말하면, 다들 겸손 떠는 줄 안다. (웃음)

Q. 전작들에 비해 영화 분위기가 바뀌었다. 발랄함이 줄고, 대신 무게감이 생긴 느낌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 개봉 당시 팬들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지금 제 영화를 좋아해주는 여러분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계속 공감하고 싶습니다.” 그 얘길 했던 건, 내 나이에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이나 <집으로...>도 그 나이 대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영화를 좋아해주는 관객들이 나이가 들어도 영화와 멀어지지 않게끔 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Q. <오늘>과 같은 (누군가를 용서해야하는 입장에 처했던) 경험이 있나?
유가족들이나 관객들에겐 죄송하지만, 영화처럼 심각하게 누군가를 용서해야할 기로에 놓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좀 더 객관적으로 영화 속 시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기에 더 조심스러웠고 고민도 많이 했다.
Q. 실제 사례를 인터뷰하기도 했나?
시나리오 단계에서 비슷한 사례의 실제 피해자나 유가족을 찾아가서 인터뷰 한 적은 없다. 많이 고민했는데 내가 찾아가 상처를 들추다가 그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까봐 그게 두려웠다. 난 원래 시나리오를 쓸 때 계약조건 같은 외부의 종용이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사비를 들여 홀로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그 과정에서 실제 그들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시나리오 작업을 했는데, 이후 이런 저런 외부 요소가 개입될 경우 이야기의 방향이 좀 달라질 수도 있거든. 그래서 행여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왜곡된다면, 그들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Q. 그러면 어떤 식으로 취재하고 시나리오를 썼나?
이것저것 많은 방법을 강구하다가 결국은 자료를 통해 많은 정보를 접했다. 우리나라는 서양에 비해 (피해자) 유가족의 현황(혹은 실태)에 대한 책이 별로 없다. 그래서 일본에 사는 친구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본은 그런 식의 소재를 많이 다뤘더라. 다큐멘터리나 책 등의 콘텐츠에서 비슷한 소재가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Q. 그래서 일본에 가 있었나. 2006~2008년엔 일본에서 작업을 했다면서. 거기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궁금하다. 정말 계속 시나리오 작업만 했나?
일본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라 좋았다. 우선 가자마자 자전거를 샀다. 거긴 자전거가 생활화된 나라잖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돌면서 느낌 좋은 카페가 나오면 들어가서 일을 했다. 옆 테이블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외국인인 나에겐 그냥 튀지 않는 배경음일 뿐이더라. TV나 잡지 속의 말과 언어 역시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같이 사는 친구는 집에 매일 늦게 들어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일본에 머물렀을 때 가장 집중력 있게 일했던 것 같다.

Q. 영화 제목이 원래는 <노바디 썸바디>였던 걸로 안다.
과연 ‘용서’라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걸까. 이러한 의문에서 지어둔 제목이 <노바디 썸바디>였다. 그런데 애초에 가제였었고, 굳이 영어로 가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인물들의 대화에서 힌트를 얻은 <오늘>이 제목으로 확정됐다. 유가족들이 상처를 어서 털고, 오늘 하루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내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Q. 작업기간이 길어지면서 초기의 구상이 변하진 않았나?
<오늘>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2005년 무렵, 국내에선 사형제 폐지 운동이 일고 있었다. 그런 사회현상을 보면서 좀 더 빨리 이야기를 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더라. 또 내가 거기(사형제도 폐지운동)서 작품의 모티브를 얻은 꼴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니까 욕심이 많아졌고, 이래저래 첨가된 이야기가 많아진 것 같다. 동시에 책임의식도 많이 생겼다. 쉽게 생각해선 안 되겠더라. 그래서 지민(남지현) 캐릭터가 추가되기도 했다.
Q. 그럼 원래 지민이는 없었고, 다혜의 이야기만 조명되는 구도였나?
응, 지민이는 애초에 없던 인물이다. 소년범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의미 있게 마무리 짓기 위해 추가된 캐릭터다. 지민이를 통해 학대받은 아이의 상태나 상황을 보여주고, 또 그걸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리고 싶었다. 지민이가 없으면 그냥 문제를 던져버리고 끝내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원래부터 아동학대가 상당히 문제가 크다고 생각 했고, 범죄자들은 다 문제부모 밑에서 큰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내 생각이 맞나 파헤쳐보고 싶기도 했다.

Q. 모든 범죄자 뒤엔 항상 문제부모가 있다고?
내가 이 작품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분을 인터뷰했는데, 경찰대 표창원 교수다. 시나리오 초안을 거의 다 쓴 다음에 점검 차 그분을 만나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분이 먼저 그러시더라. “모든 범죄자들 뒤엔 항상 문제 부모가 있다”고. 현장에 있는 그분이 확신을 하니까, 나도 내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문제 부모 밑에서 큰 아이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모든 범죄자들 뒤에 문제부모가 있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설정의 지민이를 등장시키고, 소년범 이야기를 엮어냈다. 그러면서 결국 다혜에게 어떤 연결고리를 주고 싶었다.

Q. ‘용서’를 영화의 테마로 잡은 계기가 있나?
난 어릴 때부터 너무 이상한 게 있었다. 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이 혼내잖나. 그런데 꼭 어른들은 싸움의 시시비비를 안 가리고 가해 아이와 피해 아이를 뭉뚱그려서 혼내는 거다. 변명하는 아이에겐 “시끄러! 빨리 화해하고 악수해. 이제 끝!” 이런 식으로 종결해버리고,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고 그러지 않나. 그러다보면 어른들의 그런 식의 처벌에 가해 아이는 점점 더 심술궂어질 수 있고, 피해 아이는 점점 위축되고 억울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 그게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그래도 용서는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용서는 스스로 주는 선물이다’ 이런 식의 말들도 많고, 내 종교인 가톨릭에선 항상 용서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러다 대학 땐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용서도 때로는 죄가 된다’는 내용의 한 칼럼을 읽었다. 그걸 보고 ‘아! 나도 하고 싶었던 얘기인데’하는 생각을 했다. 막연하게 품고 있던 내 생각이 외부로부터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Q. 방금 대답 중에서 가톨릭 신자란 얘기를 듣고 놀랐다. 영화가 종교적인 비판을 한다는 느낌도 받았거든.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종교는 가톨릭이었고.
음, 어차피 어느 한 종교를 도마 위에 올려야겠는데, 형평성 측면에서 고민이 되더라. 그런데 내가 가톨릭 신자니까 그래도 가톨릭을 도마에 올리는 게 떳떳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종교에 비해서 내가 잘 아는 부분이기도 하고.

Q. <오늘>처럼 종교나 사법 등 제도권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영화가 종종 나온다. 영화가 환경(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난 이번 작품을 통해 법을 개편하고 싶다기보다, 용서의 강박증에 시달리는 유가족들이 조금이라도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로’에 초점을 둔 거다.
Q.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짚더라. 실제로 사형제 존폐에 대해선 어떤 입장인가?
사람들이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 존속해야 한다, 이러기 전에 제대로 된 정보를 먼저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오늘>의 대사 속에서 정보를 많이 드러낸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정부나 언론이 국민들의 알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제대로 많은 정보를 주어서, 그 이후 국민이 선택하도록 하면 좋겠다.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표명도 그렇다. 만약 정말 사형제를 폐지한다면,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적절한 보상 등 대안이 잘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무작정 인권 자체에 포커스를 두기보다,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피해보상 등의 대안, 그리고 사형수의 커리큘럼 등이 잘 마련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제도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 입장표명은 그 후의 문제 같다.

Q. 이건 취재노트인가? (인터뷰 당시 감독 앞에는 작고 두툼한 수첩이 놓여있었다)
맞다. 이건 시나리오 쓸 때 전문적인 정보들을 내가 다 외우고 있을 수가 없어서 기록해 놓은 것들이다. 특히 수치 같은 것들을 다 외울 순 없지 않나. 시나리오 작업에 대비해서 하나하나 모아놓은 정보들이다. 인물의 대사나 줄거리 등을 수집해 놓은 수첩은 또 다른 데 있다. 또 혹시나 만나는 기자들이 법적인 부분들, 가령 우리나라의 사형수가 몇 년도에 몇 명이었는지 같은 식의 질문을 하면, 그럴 때 펼쳐서 찾아보려고 들고 나왔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질문을 안 하더라. 그래도 혹시 몰라서 들고는 다닌다. (웃음)

Q. 대사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더라. 의도는 좋은데, 너무 설명적인 느낌도 있다.
이 영화가 처음으로 이런 주제를 다룬 것이기 때문에 좀 말이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오래 끌었기 때문에, 나도 이런 주제를 다룬 (국내) 영화가 내가 최초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이 얘기를 하기 전에 누군가가 비슷한 작품을 먼저 내놓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들었는데, 그런 점에선 보면 다행이지.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불행히도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룬 첫 주자가 된 셈이다. 또, 시나리오를 쓰면서 나 스스로를 기준점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까 대사가 늘어난 부분도 있다.

Q. 그렇지만, 메시지는 결국 간결한 것 같다.
내가 <오늘>을 통해 얘기하고 싶은 건 우리 모두 남의 상처에 대해서 함부로 용서 운운하며 쉽게 얘기 하지 말았으면 하는 거다. 그리고 용서의 주체는 피해자라는 것, 그걸 사람들이 항상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남의 용서를(용서의 기회와 자유를) 빼앗지 말았으면 하는 거다. 난 용서의 위선을 꼬집고 싶었고, 용서의 강박증에 휘둘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고 싶었다. 용서의 이면에 있는 용서의 위선, 그로인해 용서의 강박증에 짓눌려 있는 피해자들, 그리고 함부로 용서를 말하는 제3자들 등…. 이런 상황을 봐주기를 원했는데, 그냥 영화를 쉽게 보면 영화가 용서에 대해서 가르치려 한다거나 너무 많은 걸 제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난 사람들이 그 시끄러운 것들을 다 파고 들어가 행간의 의미 속에 있는 용서의 이면에 대한 이야기, 그 그늘과 그림자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Q. ‘용서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기 위한 영화 속 다혜의 설정은 ‘뺑소니 오토바이 사고로 약혼자를 잃은 여성’이다. 수많은 안이 있었을 텐데, 상황 설정을 이렇게 간 이유가 있나?
다혜의 설정 자체도 가벼운 건 아니었다. 일단은 다혜는 용서의 위선에 희생당했고, 그 강박증에 짓눌린 아이로 자랐으니까. 다혜를 굳이 약혼자를 잃은 캐릭터로 만든 건, 아무래도 그 나이 대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부모님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 일거라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가해자인 소년범과의 관계도 고려했다. 다혜의 입장(약혼자)이 피해자 상우의 직계가족으로 인정받는다더라. 또 탄원서를 써 줄때도 아내의 탄원서가 제일 효력을 발휘한다고 하고. 그러니까 영화 속 관계에서는 다혜와 피해자 어머니의 탄원서가 동등한 힘을 갖고 있는 거다. 그래서 다혜만 소년범을 용서한 상태에서, 다혜가 어머니를 설득해서 같이 탄원서를 쓰는 식으로 설정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Q. 그런 복잡한 구도에 놓인 다혜 역에 송혜교를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난 시나리오 쓸 때 캐릭터가 한정될까봐, 특정인을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는다. 그리고 실은 다혜 역에 맞는 여배우가 한국에 없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송혜교 측에서 내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을 땐 “에이, 저희 다혜랑 안 맞아요”하고 고사했다. 그런데 한 번 만나보자고 얘기가 전개돼서, 실제로 혜교를 만났을 땐 좀 놀랐다. TV에서 보던 송혜교가 실제의 그녀와 많이 달라서 말이다. 뭐랄까, 애늙은이 같더라고. 혜교는 하고 싶은 말의 1/3도 잘 안하는, 속으로 삭히는 스타일이다. 감정표현을 잘 안하고,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있었을 것 같은 그런 아이다. 그래서일까. 혜교 주변엔 항상 감정의 120%를 쏟아내는 시끄러운 여인들이 포진해있다. 아, 물론 나도 포함해서. (웃음) 하여간 혜교는 항상 많이 듣고, 많이 참는 스타일이다. 형제 없이 무남독녀인 점도 다혜 설정과 같고. 그래서 ‘어! 의외로 다혜랑 어울리네’라는 생각을 하고, 시나리오를 탈고한 후 중국에서 촬영 중이던 혜교에게 보냈다. 그리고 전화 연락이 됐는데, 혜교가 그러는 거다. “가슴이 먹먹하고 기분이 이상하다. 답답해서 술이라도 한 잔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내가 다혜와 닮은 데가 많다.” 그 때 ‘아, 얘가 다혜라는 캐릭터를 이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신뢰가 가더라. 그래서 “서울에 가면 봅시다” 하고 끊었는데, 그때 혜교가 왕가위 감독 스케쥴(일대종사)이 막 늘어나면서 고민을 많이 했지. (웃음)

Q. 그런가하면 극 중 지민의 오빠, ‘지석’으로 등장하는 송창의의 경우는, 직접 출연을 의뢰했다고 들었다.
송창의란 배우를 처음 본 건 2008년에 방영됐던 SBS드라마 <신의 저울>에서였다. 그 드라마를 내가 너무 좋아했다. 그런 식의 디테일한 드라마가 그간 많이 없었고, 내가 쓰는 부분과 겹쳐지는 부분들도 있어서 유심히 봤지. 처음엔 작가의 실력에 탄복하면서 봤는데, 보면서 드라마 안의 송창의씨 연기력에 반하게 됐다. 그래서 한 번쯤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고, <오늘>에서 기회가 닿았다. 사실 지석이 역과 상우 역 사이에서 어떤 역을 맡길지 고민을 좀 했다. 그러다가 역시 지석이 역이 좀 더 힘든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고, 그 부분을 그의 연기력에 기대고 싶은 마음에 창의씨에게 지석이 역을 안겼다.

Q. 인물들이 한 집에서 아옹다옹하며 함께 지내는 건 이제 ‘이정향 스타일’로 불러도 될 것 같다. 전작들도 그랬다. 춘희와 철수(<미술관 옆 동물원>), 할머니와 손자(<집으로...>), 다혜와 지민(<오늘>)까지. 게다가 모두 집주인이 손님을 감싸 안는 설정이다. 이건 감독의 스타일일까?
어, 그러네! 그건 처음 알았다. 그리고 동거의 연장선이란 생각도 못했다. 내가 왜 자꾸 동거를 시킬까…. (웃음) 그런데 그거 의도하지 않은 거다. 다만,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한집에서 둘만 있는 게 아니라면 다른 인물들이 나와야 되는데, 그러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곁가지로 흐를 수 있지 않나. 난 주제에 관련한 인물들이 아니면 잘라버리는 성격이거든.
Q. 극 중 다혜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감정을 절제하는 게 습관이 된 캐릭터다. 그런 다혜가 몇 안 되게 감정을 드러내며 우는 씬들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다혜가 세 번 운다. 그런데 울음의 종류가 다 다르다. 성당에 가 신부님에게 감정을 쏟고 마당에 쓰러졌을 땐 토해내 듯 울었다. 상우 누나가 준 선물 속 생일카드를 읽으며 울 때는 그간 서러웠던 것들에 대해서 보상 받고 위로 받는 기분에 운거고. 마지막으로 우는 씬을 찍을 땐 내가 혜교에게 좀 특별한 주문을 넣었다. 영화 초반에 지민이가 다혜에게 “언니는 정말 다 용서했어? 그런데 왜 언니 마음속엔 빙산이 있는 것 같지? 나만 느끼나?”하는 대사가 있었다. 그 대사를 인용해서 극 후반, 다혜가 타던 자전거를 멈추고 울 때는 “다혜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던 그 빙산이 녹는 것처럼 울라”고 주문했다.

Q. 아, 어렵다. (웃음)
(웃음) “이제 그 빙산이 녹기 시작한다”고 얘기했다. 다혜는 이제까지 감정을 절제하고, 타인을 용서하라고 강요받았던 아이다. 그래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에 끌려 다니면서, 스스로를 배신하는 느낌도 있었거든. 그런데 다혜가 극 후반에 울 땐, 그런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느낌이길 바랐다. 난 그 포인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 극 중 소피아 자매가 말하지 않았나. “용서는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는 게 아니에요. 그 마음을 한 쪽으로 밀어두는 거예요. 서두르지 말아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테니까.” 다혜가 마지막 순간 우는 지점은 그녀가 그런 식의 길로 들어서려는 시도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영화는 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될 진 모르겠지만, 다혜가 그녀만의 인생, 그녀의 ‘오늘’로 들어가는 순간에서 영화를 마치고 싶었다.

Q. ‘지민’이를 천재소녀 캐릭터로 잡은 이유는 뭔가?
학대받은 아이들은 자기 부모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못하고, 언제나 스스로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더라. 부모는 원래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부모가 자신을 때리고 학대하는 이유는 우리 부모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나빠서겠지, 하는 거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애쓴다더라. 같은 맥락에서 지민이도 부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한 일환으로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한 거다. 성격 또한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지민인 스스로 인정받기 위해서 성격이 좀 도드라지고 표현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예 주눅이 들어서 비리비리한 캐릭터가 됐겠지.

Q. 그럼 ‘지민’의 부모와 오빠를 폭력성이 강한 캐릭터로 그린 이유는?
간혹 “지민이 아버진 왜 저렇게 애를 때리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땐 ‘아, 이 사람은 훌륭한 부모 밑에서 참 잘 컸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왜냐, 학대 받고 자란 사람은 폭력이 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안 하거든. 그러니까 지민이 아버지의 폭력성엔 이유가 없다. 그냥 자기 안에 폭력이 있기 때문에, 자기 성질이 나빠서 애를 때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굳이 이유를 설명을 안했다. 비슷한 예로, 젊을 때 요절한 랭보를 들 수 있다. 랭보의 어머니는 냉정하고 모성애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더라. 그런데 엄마의 사랑을 너무나 갈구한 랭보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걸 자신의 문제로 치부했다. 자기 엄마를 합리화 하기 위해서 ‘우리 엄마는 원래 정상인데 내가 나쁜 자식이라서 사랑받지 못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인식하고 상황을 만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점점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고. 학대하고 방치하고… 이런 식으로 살다가 결국 요절했다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 이게 랭보만의 문제가 아닌 거다.
Q. 적절한 타이밍일지 모르겠는데, 기자간담회 때 “지민과 소년범은 이란성 쌍둥이 같은 느낌”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아이들이 분노를 푸는 방식은 크게 3가지라고 하더라. 자기 자신, 부모, 아니면 제3자. 지민이는 분노를 자기 자신에게 푼 경우고, 소년범은 제3자에게 풀고 다닌다. 결국 어떤 식으로 푸느냐에 따라 범죄자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스스로에게 분노를 푼 지민이는 범죄자가 안 됐다. 하지만 그래서 신장이 약한 거라고 봐도 좋다. 그리고 다혜가 그런 지민이를 감싸 안고 이해하면서 (어린 시절의)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Q. 9년 전 <집으로>로 흥행성과 작품성을 다 잡았다. 그런데 이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혹시 이 자리를 빌려 누구에게든 하고픈 말이 있을까?
음…. 그땐 언론매체에게 많이 섭섭했다. <집으로...> 촬영 후, 영화 팬들이 현장에 찾아오고 하다보니까 세트장 철거가 늦어졌다. 그리고 때마침 공교롭게도 자연재해 등 이런 저런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각종 언론에서 허물어져가는 세트를 촬영해서 “할머니 집이 이렇게까지 무너져 내리는데, 감독과 관계자들은 모른 척 하고 있다”는 식의 뉴스 보도를 내보내더라. 사실 할머니 집은 거기서 한참 밑에 안전한 곳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 집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요”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건 할머니의 안전과 사생활 때문에 당연한 거다. 아무튼 그때 ‘감독님, 이래도 참을 거예요?’ ‘이래도 한 마디 안 해요?’하고 묻는 식의 (인터뷰) 요청도 많이 받고, 쏟아지는 왜곡 보도를 보면서 상처를 받았다. 사람이니까 그때 섭섭했던 건 아직 남아있지만, 계속 그 생각에 휩싸이려고 하진 않는다.

Q. 혹시 그런 감정들이 <오늘>에 반영되지는 않았나?
음…. 그렇진 않다. 난 상당히 객관적으로 쓴 것 같은데. (웃음) 그냥 그때 우리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않고, 그저 쉽게 쉽게 보도된 기사나 뉴스가 많아서 힘들었던 거다. 철거 문제도 그렇고, 그때 뭐 우리가 할머니네 집을 관광지로 만들려고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내용들이 있었거든. 그런데 아마 그분들도 (뉴스나 이슈의 속성상) 그게 100%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을 거다.

Q. 분위기를 바꿔보자. <집으로...> 때의 꼬마, 유승호가 많이 컸다. 얼마 전엔 김하늘과 스릴러 <블라인드>도 찍고, 이른바 ‘누나들의 로망’이 됐다. 이렇게 잘 클 줄 알았나?
응, 난 알았다. (웃음) 그 때 승호는 학교가기 싫어서 촬영장에 오고 그랬던 귀여운 아이였는데, 그 때도 참 바르고 예뻤다. 연기도 잘했고. 다만, 그 때 할머니와 꼬마였던 승호를 너무 전문 연기자처럼 대했던 게 돌이켜보니 좀 미안하다.
Q. 심은하를 두고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 전과 후로 나뉜다고들 한다. 이는 배우의 숨겨진 면모를 잘 끄집어냈다는, 감독을 향한 칭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에이, 그건 아니다. 이번 송혜교 캐스팅처럼, 난 심은하도 그냥 역에 잘 맞으니까 같이 했던 거다. 심은하가 이후 그렇게 뜰 줄은 몰랐다. (웃음)

Q.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의 노란 우산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에서도 다혜의 노란 우산이 눈에 들어오고. 특별히 우산 아이템을 좋아하는 건가?
그러게, 눈썰미 좋은 사람들이 간혹 물어보는데 별 다른 건 없다. 그냥 배우들에게 씌워보니까 그 노란 우산이 잘 어울리더라. (웃음) 다혜 같은 경우는 바닷가 장면에서 그 우산이 잘 어울리기도 했고 말이다. 또, 그냥 배우에 따라서 각자 그 색의 우산을 씌워보니 예뻤다. 심은하는 빨간 바바리에 노란 우산, 송혜교는 바닷가에서 노란 우산…. (미소)

Q. 국내 영화계에 몇 안 되는 여성감독 중 한 명으로,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게 있을까?
내가 여성감독이어서 특별하다든지 이런 생각은 전혀 안 해봤다. 그냥 ‘영화감독’으로서 이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를 치기어리지 않게, 장난치지 않고 정직하게 하려고 한다. 정말 이 이야기가 사회에 필요한가, 또 이걸 영화로 만들고 나면 내가 인간적으로 성숙해 있을까. 난 이 두 가지를 항상 검토해보고 작업에 들어간다. 물론, 그에 앞서 내가 사회적으로 하고 싶은 얘깃거리는 생겨야겠지. 그리고 <오늘> 같은 경우는 유가족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컸다. 이분법적으로 어느 한쪽에 휩쓸려서 쉽게 가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강했다. 민감하고 위험한 주제라는 걸 알기 때문에 나름대로 충실하고 성실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생각들이 영화 작업 중 종종 지치는 순간들을 지탱해줬다. 앞으로도 어떤 주제를 잡아도 계속 그런 태도로 일하고 싶다. 노력할거고.

Q. “촬영장 가는 게 너무 버겁다”고 한 기사를 봤다. 그렇게 힘들게 작업하면서도 느리지만 꾸준히 작품을 내는 건, 작품을 완성한 후의 기쁨이 이전의 모든 걸 덮기 때문인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일본에서 지진이 나는 등 세계 곳곳의 재난뉴스들을 보면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런 식의 재앙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 ‘하늘에서 혜성이 떨어지진 않을까?’ 뭐, 이런 생각들. (웃음) 그럴 정도로 정말 촬영하기 싫어했는데, 작업이 종료된 후 우리 영화를 통해서 행복이나 따뜻함을 느끼는 분들을 보면 너무 기쁘다.
Q. <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 사이에 4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후 <오늘>을 내놓기까진 9년이다. 원래 장기간 작업하는 스타일인가? 다음 작품은 더 많이 기다려야 할까? 생각해놓은 주제가 있나?
<오늘>의 성과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9년만큼의 공백은 안 생길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작업을 시작 할) 당시 깜냥에 비해 어려운 주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 같다. 그리고 차기작에 대한 내용도 습관대로 포스트잇에 꾸준히 정리해 두고 있다. 어떤 내용인지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처럼 계속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들일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오늘>처럼 대사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웃음)

Q. 어느 기사에서 그런 말을 한 걸 봤다. “<오늘> 작업이 늦어지면서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은 힘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 말, 어떤 뉘앙스로 받아들이면 될까?
난 예전부터 세 작품만 하고 은퇴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 작품, <오늘>은 계속 밀고 나가고 싶었다. 감독이 쉽게 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외부 요인들로 인해 작품을 포기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또 영화감독이라는 게 하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기회가 다 주어지는 건 아니잖나.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겸손해지려고 노력한다. 이 땅에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기회를 갖지 못한 많은 사람들, 그런 분들의 몫까지 대신해서 영화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를 즐기면서 만들 순 없다고 생각을 한다.

Q. <오늘>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오늘>은 우리가 남에게 “용서하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자문을 한 번쯤 하게 만드는 영화다. 난 영화를 통해 (내가 용서하기 전에 남들이 먼저) 용서를 강요하는 이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다. 사람에겐 용서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런데 남들에게 등 떠밀려 용서를 한 후, 후회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그들이 이제라도 자기 삶을 ‘내 마음의 페이스대로 살아가야 하는구나’, 하는 식의 생각을 하고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또, 부모들이 자식 키울 때 좀 더 제대로 사랑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커서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2011년 10월 26일 수요일 | 글_유다연 기자(무비스트)
2011년 10월 26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2 )
sovija
오늘이라는 영화는 이해하기가 난해한 부분도 있고 쉽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은 국내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던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 때로는 진솔하게 때로는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이정향 감독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작품. 흥행과 상관없이 전달해주는 바가 있고 감독이 알려주는 바가 분명하니 봐서 후회될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2011-11-01 20:23
ukkim47
영화관에서 사라지기전에 챙겨보고픈 맘에 생기게 만드는 인터뷰네요~   
2011-10-31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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