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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히말라야> 황정민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 이지혜 기자 이메일

요즘 <히말라야> 포스터로 관람 인증샷을 찍는 게 유행이다(웃음).
나도 봤다. (정)유미가 찍어서 올린 이후로 유행이 된 것 같다(웃음).

영화 포스터에 얼굴이 크게 나오면 부담스럽지 않던가?
당연히 부담스럽다. 포스터 촬영 전에 개인 컷을 찍지 않나. 그 사진이 포스터가 된 거다. 내 사진이 포스터가 될 줄 몰랐다. 당장 떼라고 했다(웃음).

영화 찍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다. 떡진 머리가 리얼하더라.
나만 고생했나, 다들 고생했지. 안 씻으면 머리가 떡질 수밖에 없다. 내 빨간 피부 덕도 많이 본 것 같다. 분장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고생할 줄 알면서 <히말라야>를 택한 이유는?
이 영화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댄싱퀸> 팀과 같이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댄싱퀸> 때 함께 낄낄대며 촬영했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그 마음으로 촬영하자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산악 영화를 찍어본 사람도 없었고.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아마도(웃음)……. 아무튼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가 의욕이 넘쳤다. 최초의 산악영화인만큼 우리가 레퍼런스가 될 만한 영화를 찍어보자며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 현장에 들어가니 그야말로 ‘멘붕’이더라. 물론 12좌를 올라갔었던 대장님들이 우리와 함께 하며 조언을 해주시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고글을 써야 하는지 벗어야 하는지, 장갑을 벗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더라. 또한 8000m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마스크를 쓰고 촬영한다면 관객들이 우리를 볼 수가 없잖나. 그러다 보니 마스크를 벗어야 했고, 그렇다면 수염에 눈을 어느 정도 묻힐 건지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니까 다들 모여서 늘 회의했다.

쉰 목소리도 인상적이었다.
해발 8000m에 올라가면 100% 목이 쉰다. 건조한 데다 산소량도 적기 때문이다. 영하 30도의 차가운 공기도 성대를 긁는다. 촬영을 끝내고 8000m장면을 후시녹음 할 때 일부러 생목으로 마구 소리를 질러 목이 쉬도록 만들었다. 현장에서 3일 동안 계속 소리를 질러대니까 후배들이 그만 좀 하라더라(웃음). 그렇게 목을 쉬게 만들었고 모니터로 보니 그 소리가 괜찮아서 후시 녹음 때 사용했다.

뮤지컬도 해야 하는데.
당장 이걸 해야 하는데 어떡하겠나(웃음).
산소 호흡기를 쓰진 않았나?
산소 소흡기를 사용하면 당장은 좋지만 몸이 적응하지 못한다. 산소가 적은 곳에 몸이 적응하도록 만들어야 하기에, 산소통은 정말 위험한 경우에만 사용했다.

어디까지 올라갔나?
몽블랑 크레바스가 있는 곳이 3,400m였고 오프닝에서 라면 끓여먹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 네팔 4,200m 지점이었다. 제일 높이 올라간 건 4,500m지점이다. 말이 300m 차이지, 산에서 300m면 한참 올라가야 한다. 여기에서 90m를 길로 걸으면 짧지만 산에서 올라가면 한참이지 않나. 또한 3,000m 이상 올라가면 숨 쉬는 게 힘들어진다.

영화에서 항상 고글을 끼고 다니더라. 고글로 눈을 가리고, 추위 때문에 표정 짓기도 힘들고, 목소리도 쉰 상태라면 감정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감정연기가 자연스럽고 편하게 됐다. 촬영 자체가 70명의 촬영팀이 휴먼 원정대가 갔던 길을 그대로 가는 과정이었다. 심지어 나를 비롯해 촬영 팀들은 산에 문외한이었다. 여러분들이 네팔에 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짐을 들고 대단히 힘든 과정을 함께 겪어 나가다 보니, 영화 속 동지애 같은 게 자연스럽게 생기더라.

시나리오 수락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들었다.
내가 <국제시장>을 찍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는 부산에 있었고 <히말라야>는 엎어질 수도 있다며 덜그럭대고 있었다. <댄싱퀸> 팀은 내 동지들이잖나. 마음이 안 좋아서 부산에 놀러오라고 했다. 벌써 <히말라야>를 준비한지 4년인데 영화가 엎어지면 속상하니까. 다같이 모여 소주 한 잔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이상하게 시나리오가 나한테로 올 것 같았다(웃음). 그러지 마라, 난 산 싫다고 말했는데도.

촬영 팀은 부산 내려오라는 말을 OK사인으로 받아들인 게 아닐까(웃음)?
그 당시 나는 대본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또한 나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못 박아뒀었다. 그들도 그냥 술 마시러 온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국제시장>이 끝나고 <베테랑>을 찍고 있을 때, 윤제균 감독님한테서 제의가 들어왔다. 윤 감독님의 전화를 받는 순간 이게 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대본도 보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댄싱퀸> 팀이 다 뭉쳐서 한다니까 그저 기뻤다. 예전에 같이 일을 했던 사람과 다시 영화를 찍는 건 매력있는 일이다. 그들도 나를 알고, 나도 그들을 아니까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다. 낄낄대면서 해 보자 싶어 결정됐다.

촬영 현장에서의 별명이 ‘엄대장’이었다던데.
내 별명은 엄대장이었다. 엄대장처럼 굴었다. 엄대장이니까. 보다시피 <히말라야> 촬영은 굉장히 위험한 특수 촬영이다. 누구 한 명이 나서서 군기반장을 자처하지 않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대장처럼 굴었다. 내가 나 몰라라 뒷전에 앉아 있는다면 팀웍이 이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겼고, 스탭 회의에 일일이 다 참석했다. 네팔과 몽블랑에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장면을 찍기 위해서는 내가 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팔과 몽블랑에서는 각각 얼마나 있었나?
네팔에서는 2주, 몽블랑에서는 열흘.

정말 짧다.
촬영지까지 3일을 올라가야 했으니 정작 찍은 날은 4일 정도일 거다. 또한 네팔은 아침 5, 6시에 해가 뜨면 오후 1시까지는 날씨가 좋지만 2시부터는 촬영을 할 수가 없다. 구름이 마구 몰려들기 때문이다.

헬기를 타진 않았나?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걸어서 올라가야 몸이 고산지대에 적응한다. 헬기로 올라가면 고산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고산병은 없었나?
왜 없었겠나. 그냥 참고 ‘나는 괜찮다’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내가 괜찮은데 어딜 감히, 따라 와!’ 했다(웃음).

어떤 증상이 있었나?
평생에 한 번쯤 엄청나게 과음을 하는 날이 있지 않나. 바로 그 다음 날의 숙취 같았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두통이 24시간 내내 지속됐다.

그러면 술은 못 마셨겠다(웃음).
그래도 먹긴 먹는다(웃음). 그리고 고산지대에서는 얼굴이 붓는다. 산소가 없으니 혈관이 쪼그라들고 그렇기에 뇌가 아픈 거다.

히말라야의 풍경은 어땠나?
별이 내 눈앞에 있었다. 실제로 그 광경을 보면 여기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내 시야에 산이 들어오지 않는다.

황정민과 정우가 정상 부근에서 함께 해돋이를 보던 장면도 실제로 히말라야에서 촬영한 건가?
그 장면은 조명을 단 대형 크레인을 마치 태양이 떠오르듯 들어 올리면서 촬영한 장면이다. 7, 80m쯤 되는 영월 채석장의 빙벽 중턱에 매달려 촬영했다. 우리가 보는 산의 전경은 산악 전문 촬영팀이 촬영한 에베레스트 사진을 합성한 장면이다. 덕분에 CG팀장님은 에베레스트를 서너번씩 오갔다. 거의 산쟁이 다 됐다(웃음).

<베테랑> 인터뷰에서는 역에 몰입하기 위해 유아인과 거리를 뒀다더라. 이번에는 정우와 붙는 신이 많다. 그런 만큼 정우에 대한 느낌도 남다를 것 같다.
정우가 팀의 막내였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정우는 네팔에서 고산병으로 제일 많이 고생했다. 고산병이 오면 무조건 하산해야 한다. 약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한 명이 내려가면 남은 사람들이 두 배로 일을 해야 하는 터였다. 정우가 아픈 것을 참고 연기하는 게 보였음에도 내려 보낼 수 없었기에 등이나 토닥여주는 정도였다. 미안하다, 고생했다 말할 수 없는 내 심정과 그 친구의 미안함 같은 게 뒤섞였다. 전반적으로 촬영 현장은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내 자괴감도 심했다. 내가 왜 아끼는 친구와 동료들을 모질게 대해야 하나 자책했다. 그런 자책감들과 미안함들이 얽히고 설켜서 자연스럽게 동료애가 생겼다.
예전에는 황정민이 부각되는 역할을 했다면 <국제시장>부터는 다른 배우들을 서포트하는 주인공 역을 하더라. 이번에는 정우 씨를 서포트한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작품의 일부 캐릭터로서 내가 잘 가고 있는가의 여부다. 30대에는 정말 열심히 해서 나 잘났지, 했다면 40대에는 일을 즐기면서 하는 느낌이다. 내가 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며 하기에 행복하다. 영화 자체가, 그 인물로서 보여지는 게 좋다.

그런 동료애가 영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몽블랑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네팔에서는 그래도 낙타가 있어서 짐을 실을 수 있었는데 몽블랑은 아무 것도 없었기에 우리가 짐을 나눠서 져야 했다. 여자 친구들에게는 전투식량을 들고 올라가게 했고 남은 짐들은 남자들이 짊어졌다. 내가 먼저 나서서 무거운 짐을 들었다. 촬영장비, 의상 등의 많은 짐을 두고 나 혼자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도 어쩔 수 없이 짐을 져야 했다. 나도 싫은데 걔네들은 얼마나 싫었겠나(웃음). 내 나이가 벌써 50이 다 돼 가는데(웃음).

엄홍길 대장님은 영화를 보셨나?
VIP시사회 때 오신다던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 우실 거다. 워낙 눈물이 많은 분이시라.

의외다.
물론 엄홍길 대장님은 터프하시다. 안전줄을 매고 다니지 않으면 야단치고 그러신다.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사고가 나길 바라면서 촬영하는 게 아닌 만큼 후배들을 많이 야단쳤다. 엄홍길 대장님의 팀원이 날 보더니 ‘홍길이 형과 똑같다’더라. 그렇지만 엄홍길 대장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음에도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사실 속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치부를 드러내는 것 아닌가. 더욱이 8,000m 지대는 죽음이 눈앞에 닥쳐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게 되는 전쟁터다. 목표는 목표대로 이루고 사람은 사람대로 살려야 하는 그 곳에서 엄홍길 대장님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느꼈다.

이렇게까지 현장에서 대장 역할을 자처한 적이 있나?
없다. 난 대장 노릇하는 걸 싫어한다(웃음). 쉬는 시간이면 오락하고, 누가 뭘 해달라고 하면 해 주고, 끝나면 뭐 먹을까 고민한다. 보통 촬영장이 그렇잖나. 그런데 에베레스트에서는 달랐다. 그렇기에 양수리 야외 세트장에서 마지막 촬영이 끝났을 때는 눈물이 났다. 촬영이 끝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의 중압감들이 와르르 무너지더라.

기자간담회에서 ‘외로웠다’고 했다. 그 외로움은 대장으로서의 외로움이었던 건가?
주인공 형으로서, 대장으로서, 촬영 현장의 리더로서의 외로움이 있었다. 나에게는 힘들다고 말할 사람이 없었다. 내가 감독님에게 힘들다 말하겠나, 후배한테 힘들다 하겠나(웃음). 그렇기에 나 혼자 자책하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곳에서 고생을 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그 감정들을 겪어나간 게 인간적으로도, 연기에 있어서도 많은 공부가 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다큐멘터리와 비슷하게 갈 것이냐, 더 많이 재해석할 것이냐로 말이 많았을 것 같다. 실존 인물을 재연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을 테고.
재연은 없었다. 실존인물을 재연한다면 내가 재연배우와 다를 게 뭐가 있겠나. 그럴 거면 차라리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게 더 나은 거고. 그럼에도 우리가 이 이야기를 영화화해서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찾는 게 감독님과 나에겐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20년 만의 겨울 더위로, 영월에 만들어놓은 빙벽이 녹아내렸다. 덕분에 한 달 여를 모텔 방 안에서 대기 상태로 있어야 했다. 심적으로 정말 힘들더라. 이 영화로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한 중압감이 심했다. 그러다 엄홍길 대장님이 휴먼 원정대를 다녀오고 나서 출간한 ‘약속’이라는 책을 봤다. 촬영 전에 받아뒀지만 내 연기가 그 책에 영향 받을까 싶어 읽지 않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책을 보는 순간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이 들더라. ‘약속’을 읽으면서 한참을 혼자 술 마시며 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이야기 자체가 다큐멘터리, 실화를 벗어날 수 없고 우리 역시 실화를 이길 수 없다면 우리가 그 이야기를 안아내야 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 사건을 잘 헤아리는 게 우리의 목표란 걸 알았다.

어떤 식으로 안아냈다는 건가?
엄홍길 대장이 박무택 대원을 찾으러 간 이유를 깨달으면서다. 이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 그리고 휴먼 원정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다. 휴먼 원정대는 늘 정상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죽은 시신을 거두기 위해 발을 내딛는 과정이다. 산이 우리에게 주는 위대한 감정들도 있겠지만 휴먼 원정대와 이 영화는 사람과의 관계를 말하기 위한 거였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흐트러졌던 마음들이 한 줄로 쫙 줄이 세워지면서 관통하는 부분이 생기더라. 그래서 감독님과 다시 한 번 얘기를 나누고 영화의 흐름을 수정했다. 사람에 대한 얘기를 보강했다.

바뀐 장면이나 추가된 장면이 있나?
많다. 예컨대 정유미와 무전기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원래 나는 울지 않는 신이었다. ‘돌무덤 만들고 내려갈게’라고 말하는 게 끝인데 사람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이후에는 울면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산 사람이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살리고 싶어졌다. 이 장면이 비로소 엄대장이 속내를 내비치는 장면이다. 그 날 사람에 대한 마음을 깨달은 이후에는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주위 사람들이 날더러 왜 저러냐고 할 정도로 미친 듯이 했다(웃음). 왜냐하면 그때는 확답이 있었으니까. 확신이 있었으니까.

에베레스트, 특히 박무택 대원이 돌아가신 세컨드스텝은 악명이 높다. 베테랑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님도 그 시신을 가지고 내려오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을텐데, 그 심리를 어떻게 이해했나?
그 이유가 바로 조금 전에 얘기했던 ‘사람’이다. 전세계 산악계에서 에베레스트에서 죽은 시신을 갖고 내려오는 일은 없다. 얼어붙은 시체는 그냥 표지판으로 내버려 둔다.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그 일을 하는 건 죽겠다는 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올라간 이유, 그건 우리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끈끈함이다. 몸 속 수분이 다 얼어붙어 100kg이 넘는 시체를 가져오려는 건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강한 유대감 때문이다. 그 곳에 올라가면 칫솔도 무거워서 플라스틱 대를 자르고 배낭의 끈도 자른다더라. 한 두 발자국만 걸어도 쉬어야 한다. 때문에 외국 사람들은 이 일을 가리켜 무식한 일이라고도 한다.

관객 중에서는 엄대장의 문어체적인 대사가 다소 낯설다는 평도 있었다.
감독님의 시나리오 스타일이 원래 문어체인 데다, 대사가 많다. 원래 감독님 자체도 말을 잘 안 하신다. 말을 하면 웃긴데, 글을 쓰면 진지한 타입. 우리 감독님이 앉아 있으면 지방 동사무소 직원처럼 보이잖나(웃음). 그렇지만 그런 대사는 감독님의 본래 스타일이고 냄새, 향기다. 난 좋았다.
2015년은 황정민에게 있어서 좋은 해였다.
미치는 해였다. 내 인생에서는(웃음).

2천만 배우도 됐고 내년에는 곧바로 검사외전을 앞두고 있다. 소감이 있다면?
내 인생에서 2015년은 절대 잊지 못할 거다. 분명 나이 들어서도 이 해를 기억할 거다. 하나님이 내게 큰 선물을 주신 것 같은, 축복받은 해였다. 지금 촬영하고 있는 <아수라>도 열심히 할 거고 내년에는 연극을 한 편 올릴 예정이다. 셰익스피어 정통극을 하고 싶다.

문어체 대사의 최고봉 아닌가?
그렇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거의 시나 다름없다. 정말 어렵더라.

최근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즐거웠던 일은?
지금 뮤지컬 ‘오케피’를 준비하는 게 가장 즐겁다. 18일에 오픈하는데 무대에서 배우들과 같이 뛰노는 게 좋다. 감독의 예술인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배우의 예술이다. 내가 판을 깔아주고 배우들이 잘 놀 수 있도록 지켜보며 힘을 불어넣는 게 뮤지컬인 듯하다. 영화 연출은 렌즈도 공부해야 하는데 난 그런 게 머리 아프다(웃음).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 글_이지혜 기자 (wisdom@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_이종훈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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