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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로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랜드파더> 박근형
2016년 9월 1일 목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 박은영 기자]
노배우 박근형은 굳이 이렇게 힘든 역할을 한 이유가 뭐냐는 우문을 던지자 ‘새로우니까!’라고 명쾌히 응수한다. 고등학교 때 처음 시작한 연극이 재미있어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고 그로부터 57년이 지났다. 지금도 처음처럼 연기는 한없이 재밌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색깔을 담은 캐릭터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이 행복하다. 그렇기에 그는 77세의 나이를 잊고 몸을 만들고, 버스 기사 면허를 획득하며 ‘기광’이 되기 위해 하나씩 준비했다. 세상으로부터 손녀를 지키고 싶은, ‘기광’의 방식에 동조는 못해도 그 마음만은 절절히 공감하기에, 그랜드파더로서 <그랜드파더>의 ‘기광’을 연기했다. 또, 그는 배역이 오길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닌, ‘만약에’ 내가 저 역할을 했으면 어떨까 상상하며 항상 새로운 역에 준비하고 있다. 배우로서 나이 든다는 게 아쉬운 점은 단 하나, 다양한 연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뿐이라는, 타고난 연기자 박근형을 만났다.

(본 인터뷰는 영화 <그랜드파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그랜드파더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남우주연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이후 영화로 상을 타신 건데 느낌이 남다를 거 같다.
연극 <아버지>를 하던 중이었는데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던 거라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내가 받아도 되나 싶고, 혹시 나이 순으로 주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런데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굉장히 기분이 좋은 거다. 사실 기분이 좋은데 주책이라고 할까 봐 내 입으로는 자랑하기가 뭐 했다. 그리고 언론에도 많이 보도 안 돼 처음에는 좀 섭섭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하나 둘씩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기더라.

지금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많은 상을 받으셨는데, 이번 상의 특별한 점은.
이게 국제 영화제, 그것도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받은 상 아닌가. 지금까지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적도 없고, 판타스틱영화제라는 거 자체가 참 낯선 거였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
<그랜드파더>가 우리 현실과 닮은 소재다 보니, 단순히 연기를 한다기보다는 실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으셨겠다.
이 영화가 조직적인 깡패나 폭력조직을 다룬 게 아니고, 그냥 우리 옆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을 다룬다. 우린 알게 모르게 이웃을 해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뭔가 생각해보니 제일 처음 떠오르는 게 가족 간의 단절이었다. 극 중에서 ‘기광’(박근형 분)은 오랜 시간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들의 장례식에 가서야 자신의 손녀, ‘보람’(고보결 분)을 만난다. 그 순간이 기광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 나한테도 피붙이가 있구나’ 이런 느낌이다. 노인이 된 뒤에 만난 손녀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든 보호해주고 싶고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차에 태워 등교를 시켜주기도 한다. 처음에는 손녀도 마음을 안 열다가 점차 마음을 열어간다. 보람이가 사진을 찍는 장면이 바로 그거다.

영화의 급진적인 면이 끌렸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급진적인가.
가장 나를 사로잡은 건 이게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라는 거였다. 평범한 사람이, 그것도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손녀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는 설정이 참신했다.

극 중 할아버지로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보람이가 할아버지한테 "아빠는 몇 년 전, 나한테 자살하지 않기로 약속해놓고 먼저 죽어버렸다. 나도 대충 살다가 힘들면 그냥 죽어버리면 된다" 고 하고 외친다. 아, 그 순간은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누구라도 부모로서 그런 말을 듣는다면 견딜 수가 없을 거다.
기광의 감정변화의 폭이 크다 보니 연기하는 게 쉽지 않으셨겠다.
영화는 드라마에 비해 대사로 표현하기보다 표정과 행동으로 더 많이 표현한다. 아마 드라마였다면 더 대사가 많았을 거다. 그건 그대로 맛이 있다.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서 끌어내는 연기를 해야 하는 거, 그 점이 좋았다. 또, 촬영 당시보다 영화가 잘 나와서 기분이 좋다.

정진영과의 액션 신이 크고 요란스런 신은 아니지만 인상적이다.
정진영이 함께 해줘서 고맙다. 양면적인 얼굴을 가진 사업가 역할을 아주 잘했다. 그도 가족을 위해 딴에는 절실히 사는 사람으로 나온다. 극 중에서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 내가 안 하면 남들이 한다. 나도 먹기 살기 위한 것’ 이라고 외친다.

그 장면 촬영 현장에 대해 자세히 얘기한다면. 고소공포로 고생하셨다고 들었다.
11층인가에서 촬영했는데 난간이 없어서 아주 위험했다. 사실 액션보다도 이번 촬영에서 가장 힘든 점은 높은 곳에서 촬영한 거였다. 또 바닥은 철심과 요철 등 이런 것들 때문에 위험했다. 정진영이 아주 열심히 해줬고, 나는 액션을 받는 입장이라 오히려 수월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시다면.
버스를 폐차하는 장면이 있다. 커다란 기중기가 버스를 폐차하기 위해 위에서 내려찍는다. 버스는 기광의 분신과도 같다. 다 낡아빠졌지만 동고동락하는 존재. 그런 존재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마치 자식을 보내는 심정과 비슷하기도 하다. 폐차를 지켜보는 기광의 뒷짐진 손에는 자동차 키가 들려있고, 그걸 만지작거린다. 또 중간에 뒤 돌아 나가는 건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한 마음을 나타낸다.

<그랜드파더>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을 모티브로 해 사실적이나 너무 극단으로 치닫고 있기도 하다.극 중 기광이나 보람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보람은 자살한 아빠를 따라 대충 살다가 괴로우면 그냥 죽어버리겠다고 한다. 그런 손녀를 보며 괴로운 할아버지가 형사를 찾아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다시 조사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무시당한다. 그때부터 아마 기광의 분노는 쌓여 다져지고 있을 거다. 그게 폭발하게 된 계기는 보람이 자해를 해서 병원에 가면서부터다. 마지막으로 또 형사를 찾아가지만,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극단의 행동을 하게 되는 거다. 억압된, 억눌러왔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고 보면 된다.
마지막에 기광의 품에서 녹음기가 나온다. 기광이 정의에 대해 마지막까지 한줄기 희망을 품고 있었음을 암시하는지.
그건 손녀 보람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사회를 고발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행동에 이유를 부여해준 거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서 손녀를 보호하고 상대에게 죄를 묻고자 한 것으로 이야기 흐름상 중요한 부분이다.

이서 감독과의 호흡은 어떠셨나.
정윤철 감독이 가운데 껴서 시끄럽게 해서 그렇지(웃음) 이서 감독과는 아주 잘 맞았다.

보람역의 고보결 연기가 좋더라.
아주 잘 했다. 연극을 하다 보면 극중 나이보다 5살에서 10살 정도까지 많은 사람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보결은 실제론 나이가 많지만 외모는 고등학생에 맞는 동안이다. 또 그 호수같은 눈망울에 외로움, 절망, 기쁨 이런 것들이 다 담겨 있다. 가능성이 큰 배우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에게 <그랜드파더>를 추천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론 새로운 장르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보고 평가해주면 감사하겠다. 또 이런 작은 영화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


# 박근형


영화 속 ‘기광’은 가족이 있음에도 단절된 삶을 산다. 선생님과의 현실과는 너무 괴리돼서 연기하는데 힘들지 않으셨나.
나도 가족간 단절을 겪었다. 난 연기에 미쳐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좋았을지 몰라도 가족들은 힘들었을 거다. 어느날 보니 자식들이 다 성장해 있더라. 잘하려고 해도 어색하고, 아내한테도 아내가 나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 거 같아 죄스럽고 하다. 자녀한테 못했던 부분을 그들의 아이인 손주들한테 해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손주바보’가 된 거고. 그들한테 사랑을 쏟아 붓는 마음에는 ‘내가 이렇게 너희들 아이를 사랑하는 건 너희들한테 못했던 부분을 보상해 주려는 의도도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우리 아들이 어느날 나한테 하는 인사가 ‘또 오세요’ 더라. ‘다녀오세요’가 아니라. 그때 충격이 컸다. 얼마나 단절돼 있으면 아버지한테 또 오라고 했겠나.

어떻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전라북도 정읍이 내 고향이다. 아버지가 목 부분에 큰 상처가 있어서 그걸 고쳐드리고 싶었다. 그때부터 의사가 돼야지, 그래서 아버지를 고쳐드려야지, 이런 생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중학교도 좋은 곳으로 진학했다. 어느날 큰 도시에 나가서 더 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서 서울로 유학을 왔다. 서울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중 유치진 선생님이 주최한 고등학교연극경연대회가 열렸다. 남자는 사육신, 여자는 견우와 직녀의 직녀였다. 그게 하고 싶더라. 그래서 사육신으로 참가를 했다. 하고 난 뒤 좀 잊을 만 했는데 해마다 학교 동아리 연극을 하는 거다. 거기에 참여하다 보니 연극바람이 들었다. 극단만 쫓아다니다 보니 공부가 소홀해졌다. 근데 연극을 하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

그래서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한 건가.
4년제 대학을 가고 싶은데 그땐 연극영화과가 없었다. 마침 충무로에서 이론과 실습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연기학원 1년 과정이 생긴 거다. 그때 스타니슬랍스키 연극이론에 대해 배웠는데 너무 심취해서 결국 남자 6명, 여자 4명이 뭉쳐 극단 ‘협연’을 만들었다. 공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엑스트라 출연하여 돈을 모으고, 무대 장치도 다 우리 손으로 설치해서 원각사에서 공연을 했다. 그러던 중 2년 지나니까 중앙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생겨서 나는 학교로 갔고, 동료들은 충무로에 남아서 누구는 감독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이 세계를 떠나기도 했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1회 졸업생이시다(웃음).
그렇지. 원래는 배우의 길이 고통스러워 연기 안 하겠다고 전공으로 연출을 택했다. 그런데 배우들이 연습을 너무 안 나오고 내가 연극을 한 경험이 있다 보니 계속 대역을 하게 되는 거다. 또 공연 시일이 급박하니 ‘네가 대신해야 한다’, 난 ‘힘들어서 안 한다’ 이러다가 결국 배우를 계속 하게 됐다. 그때 대학생 배우라고 해서 여운계와 내가 뽑히기도 했다. 여운계는 드라마 쪽에서 나는 연극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너무 먹고 살기 힘들다 보니 KBS 공채 3기로 방송국에 들어갔다.

그 당시 공연 출연료는 얼마 정도였나.
내가 국립극단의 단원이었을 때 봄, 가을 정기적으로 2번 공연을 하는데 한 번 공연하면 만 5천환을 받았다. 일 년에 3만환을 버는 거다. 그때 쌀 한 가마니가 3천 환 정도 했다. 그러니까 거의 생활이 안 되는 거다. 걸어 다니고 굶고, 서로 돈 없어서 눈치보고. 끝임 없이 연습하며 거의 자학처럼 연극을 했다. 보통 1년에 잘하면 4~5편 연극공연을 하는데 난 1년에 11편을 2년 동안 했다.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다른 연극에서 배역이 있으면 또 하는 식으로. 노는 것보다 연극을 하는 게 훨씬 재밌으니까. 그 시간이 나한테는 정말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연극을 하다 보니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역할을 한 거다. 그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프로로 나서서 보니 그때 경험한 진가가 발휘되더라. 내 연기의 발판은 그 당시에 다져진 거다.

1년에 11편이 가능하다니!
겹치기 정도가 아니라 정말 미친 것처럼 연극을 한 시절이다. 좋아서 한 거라 가능했다.

오랜만에 연극 <아버지>를 하시면서 느낌이 남달랐겠다.
2달 정도 연습을 했는데, 요즘과 예전의 연기 스타일이 다르다는 걸 많이 느꼈다. 우리 때 내면연기를 중시했던 거에 비해 요즘은 외형적인것을 추구하는 게 대세인 듯하다. 연극은 허구를 무대에 올리는 건데 극언어를 사용할 건지, 생활언어를 사용할 건지 연출자와 상의를 많이 했다. 그 후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 연극 <아버지>가 완성될 수 있었다. 젊은이들도 고생을 많이 했다.

드라마에서 회장님 전문배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 모습이 틀에 박히지 않고 다 다르시다. 비결은.
아까 말했듯 연극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던 게 도움이 됐다. 회장도 다양한 회장이 있다. 진짜 재벌도 있고, 자수성가한 소시민적 회장도 있고. 대본을 바탕으로 의상, 말투, 헤어 등 조금씩 차별화하려 한다. 다행히 인정받아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웃음).

슬럼프를 겪으신 적은 없나.
나이 50세가 넘어서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던 때가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멜로드라마도 하고 멋있는 역할을 했는데 갑자기 배역이 공중에 뜬 거다. 거의 6개월에서 1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덕성여대 교수가 ‘역할창조’에 대해 쓴 글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첫 실험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조선인 일본 형사 ‘스즈끼’역이다. 외형적으로는 무자비해 보이나 속으로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제 5열’, ‘모래시계’에 출연했다. 다행히 다 성공적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과 차별화되는 나만의 역할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원로배우의 입지가 좁아지는 게 현실이다. 선생님이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난 배역이 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항상 준비를 하고 있다. TV나 영화를 보며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서 내가 저 역할을 했으면 어떻게 연기할까 하고 상상력을 발휘시키는 거다. 모든 생활에서 그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하고 작업을 할 때 그 사람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끌려 다니려면 연기 그만해야지.

나이를 떠나서 탐나는 캐릭터가 있으시다면.
음,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 역을 내가 하면 아주 잘했을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최근 ‘디어 마이 프렌즈’가 노년의 우정을 주제로 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고 시청률도 좋았다. 그 드라마에 출연 안 한 게 아쉽진 않으신지.
아주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꽃들이 있는데 약간 시든 꽃이 몇 송이 섞여 있는 건 보기 좋다. 그런데 싱싱한 꽃은 없고 다 시든 꽃만 있으면 그건 또 문제다(웃음). 그래서 <그랜드파더>에서처럼 시든 꽃이 적은 게 좋다. 왜냐면 여러 세대가 섞여있는 게 좋지 않나.

나이듦에대한 두려움이나 아쉬움이 있으시다면.
솔직히 죽음에 대해선 겁먹고 무서운 거 하나도 없다. 그걸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할 일 하다가 나중에 급박히 죽으면 되지. 그래서 꿈이 필요한 거다. 단지, 시간이 아깝긴 하다. 남은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하고 싶은 역할도, 아직 못해본 역할도 많은데 말이다.

꽃할배 박근형의 젊은 시절 사진이 화제였다.
젊은 시절엔 별로 환영 받지 못한 외모였다. 미남은 시대가 만들어 주는 거 같다. 그 당시 내 외모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더라. 키도 너무 크고 코도 높다고. 그래서 더 연극에 전념했던 것도 있다. TV보다 연극무대에는 나 같이 선 굵은 사람이 필요하니까. 농담처럼 내가 요즘 태어났으면 다 평정했다고 말하곤 한다(웃음).

연극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프다.
너무 힘들게 연극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투잡, 쓰리잡도 부족하다 하고 다섯 개까지 아르바이트 한다는 친구도 있다. 연극인들 배고픈 게 지금이나 내 젊은 시절이나 변한 게 없는 듯하다. 연극은 어떻게 보면 한류의 기본이기도 하다. 국가적 정책으로 지원이 필요하다.

앞으로 <그랜드파더>같은 작은 규모의 영화에 계속 출연할 생각이 있으신지.
물론이다. 연극하는 후배가 위안부 얘기를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함께 하기로 했다. 일반적인 위안부 얘기와는 다른, 젊은 시절 위안부였던 여자의 노년이야기다. 난 그녀의 남편으로 출연할 예정이다.

최근 기쁜 일이나 인상적인 일이 있으시다면.
남자뿐인 집안에 2년 전 손녀가 태어났다. 요즘 그 손녀 보는 게 가장 기쁜 일이다. 얼마나 예쁜지 내가 ‘에고, 이 예쁜 게 어디서 떨어졌나’ 이런다. 거기다 애교도 만점이다. 또, 연극 <아버지>, 영화 <그랜드파더>를 할 수 있었던 것. 이를 통해 노년의 꿈이 이뤄지는 거 같아 기쁘다.

2016년 9월 1일 목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young@movist.com 무비스트)
무비스트 페이스북(www.facebook.com/imovist)
사진_김재윤 실장(Z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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