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부터 사치하기로 작정했다 <죽여주는 여자> 윤여정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 류지연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류지연 기자]
세련된 감각과 유쾌한 모습은 배우 윤여정이 가진 이미지다. 사회 끝에 내몰린 ‘박카스’ 할머니는 그녀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다. 그래서 영화를 찍으면서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런데도 <죽여주는 여자>를 선택한 이유는 예순부터 사치하기로 작정한 결심의 일환이다. 그녀에게 사치는 작업하고 싶은 감독과 작업을 하고,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 것이다. 윤여정의 사치가 관객에겐 고맙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소감이 어떤가.
특별한 소감은 없다.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명필름에서는 내 데뷔 50주년을 맞아서 특별상영전을 연다고 하더라. 결혼 50주년도 아니고 딱히 세어보진 않았다.(웃음) 66년에 데뷔했는지 67년에 했는지도 헷갈리더라.

기자시사회를 놓쳐서 일반 상영관에서 영화를 봤는데 관객 연령대가 다양했다. 반응도 좋은 것 같고.
나보다는 감독님에게 보내는 찬사라고 생각한다. 다루기 민감하고 터부시 되는 주제를 이재용 감독이 건드린 것이다. 내 친한 친구만 해도 이런 영화를 찍게 됐다고 하니 제목부터 이상하다면서 말렸다. 그 친구를 VIP 시사회에 초대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더니 잘 했다고 해주더라. 가치 있는 일을 했으니 이재용 감독에게도 더 응원을 해주라고 했다. 힘이 됐다.

아무래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 선뜻 출연을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작품보다는 사람을 믿고 선택했다. 이재용 감독이 아니라 처음 보는 감독이 이 시나리오를 가져왔다면 많이 고민했을 거다. 결국 영화는 어떤 소재를 택하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느냐에 달린 거지 않나. 내가 아는 이재용 감독은 이 소재를 자극적이게 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도 성매매 장면을 비롯해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
성매매 장면만 해도 그냥 스케치 정도로 지나가겠거니 했지 설마 이렇게 디테일하게 시키리라 생각 못했다. 근데 아니더라. 엄청난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 그렇게 속으면서도 산다.

이재용 감독과 오랜 시간 신뢰를 쌓아온 관계여서 배우의 편의를 봐주셨을 것 같았는데, 현장에서 많이 힘들게 했나 보다.
내가 연기에 임할 때 늘 그렇듯,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하고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디테일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세 번째 테이크까지는 했는데 그 이상은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소리를 질렀다. 나중에 감독이 말하길, 태어나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는 여자는 처음 봤다고 하더라. (웃음)
우리 사회가 점점 고령화 되면서 독거노인 문제, 안락사에 관한 논의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직까지 사회에서 죽음을 터부시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죽는다는 건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아닌가. 꽃도 피었다가 지고, 사람도 태어났다가 죽는 거다. 고민을 하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하버드 나온 의사가 쓴 책을 본적이 있는데 사실 별 대답은 없더라. (웃음) 어쨌든 그 책은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억에 남는 대목은 암 말기를 선고 받은 음대 교수의 얘기였다.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마저도 피아노 레슨을 하고 싶어했다고 하더라. 그리고 즐거워하면서 돌아가셨다고. 그 말이 짠했다.

영화를 통해 ‘박카스 할머니’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됐다.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영화를 통해 알고 싶지 않은 걸 알게 됐다고 말했던데.
나이가 들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려운 경험들은 피하고 싶다. 힘든 세상을 더 알게 된다고 해서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인도 못되고. 영화를 찍으면서 우울증이 왔다. 그 할머니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일 것 아닌가. 내가 우리 엄마의 소중한 자식인 것처럼. 그랬던 사람들이 그런 비참한 상황까지 내몰리는 상황이 슬펐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내가 지금 일흔 살인데, 내 경우에는 연기라는 기술이 있으니 지금껏 일할 수 있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일흔 살의 노인이 돈이 필요할 경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용자입장에서 노인 노동자가 반가울까. 박카스 할머니는 사회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지만 이런 식으로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이라고 봤다. 영화에도 나오는 “그 사람은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야” 라는 대사처럼.

연기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
성 서비스를 실제로 하는 씬을 찍을 때. 정말 죽기 전까지 몰라도 되는 일이었는데 그걸 알게 되면서 정말 우울했다. 산다는 게 뭘까. 말로는 다 알았다.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걸. 그런데 그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장을 맞이하니 쉽지가 않더라. 연기하면서 그 디테일들을 표현해야 했고. 어쨌든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 디테일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 영화를 보면 머리스타일이 바뀌는 것이나 청 소재의 의상들도 눈에 띈다.
이 여자는 70년대 동두천에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자식까지 낳으면서 인생의 희망을 가졌을 거다. 그래서 아마 그 시절, 자기가 가장 예뻤을 시절의 옷을 고수하고 있는 거라고 봤다. 할머니의 비루한 자존심인 거다. 영화 내내 주인공은 난 이런 일을 하지만 당신들하고는 다르다는 자존심을 붙잡고 있다. 그런 점이 참 슬펐다.

영화 속에서 소영의 성격이 한 번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소영이 마냥 이기적이고 영악한 사람으로 보이다가, 코피노 아이를 집에 데려오고 나서부터는 그녀의 모성애를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 대한 해석이 각자 다를 수 있는데, 나는 도망가는 아이를 붙잡은 여자의 행동이 죄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이를 버린 사람이 가지는 죄의식. 그래서 자기도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도 앞뒤를 따지지 않고 아이를 데려온 거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사는 대안가족 같은 인물들도 모두 따뜻하다. 아이를 데려온 걸 보고도 윗집의 트렌스젠더는 이유를 길게 묻지 않는다. 이해하는 거다. 다들 서럽게 살고 소외 받고 손가락질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지만, 아픔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남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 이해해준다. 가끔 아이를 맡기고 나가야 하는 상황일 때도, 누구 하나 왜 아이를 데려왔냐는 푸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따뜻하게 그려낸 이재용 감독의 시선이 좋았다.
이후 소영이 노인들의 자살을 돕는 장면을 보면서, 그녀가 어쩌면 그들을 구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전무송씨가 내게 그랬다. 이 여자는 살인자가 아니라 천사라고. 보는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여줬다면 고맙다. 유시민씨가 영화를 보고 노인들이 죽기 전에 직면하게 되는 세가지 공포를 잘 표현했다고 하더라. 첫 째는 중풍과 같은 병이 걸렸을 때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음으로 인한 자존감의 붕괴. 두 번째는 치매로 인한 자아 상실에 대한 공포. 세 번째는 사랑하는 상대를 잃음에 대한 절대고독.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많이 고민했다. 결국 죽여 달라고 하는 할아버지와 그를 죽이는 소영의 입장 모두 이해가 갔다. 소영이 첫 번째로 죽이게 되는 할아버지의 경우, 그는 건강했을 적 소영에게 팁도 많이 주던 신사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엉덩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경우 얼마나 하루하루 죽고 싶겠는가. 그래서 나는 나를 죽이는 신념으로 그도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영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 뒤처리를 전혀 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다. 그 후 경찰에게 잡혀가면서 감옥에서는 밥이 어떻게 나오냐는 혼잣말을 했던 걸 보면 그녀는 언젠가 자신이 감옥에 갈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그 여자는 진작에 죽고 싶었을 사람이다. 감옥 가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고, 모두 잡힐 줄 알고 한 일이다. 사람을 죽였는데 설마 아무일 없을 거라 생각했겠나. 소영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여자다. 소영이 산에서 등을 떠민 치매노인도 그렇다. 두 번째로 노인의 자살을 돕는 상황에 대해서 감독과 고민을 정말 오래했다. 치매가 온 노인을 소영은 단 한 번 만났고, 그가 부탁한다고 해서 자살을 선뜻 도와줄 수 있을까. 결국 해결은 안 났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산에 오르던 중 노인이 너무 숨이 차니까 쉬었다 가자고 하지 않나. 죽으러 가는 길인데도 쉬었다 가자는 모습에서 그도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 느꼈다.

KFC에서 치킨을 살 때 안 도와주셔도 된다고 말한다든지, ‘썬 오브 비치’같은 영어 비속어를 할 때 재미있었다. 애드립이었나?
아니다. 이재용 감독 의견이다. 감독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계산 도와드릴까요’랑 ‘고객님 커피 나오셨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게 도대체 무슨 어법이냐고. 대체 한국어가 왜 이렇게 된 거냐고. 콜라가 왜 ‘나오시는’ 거냐고 평소에 그렇게 불평을 한다. (웃음)

영화와 미디어를 통해 보는 윤여정의 모습은 항상 유쾌하다.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점들이 있나.
소통하려고 애쓰는 건 특별히 없다. 그것보다는 개인적으로 환갑이 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즐겁게 살리라 작심을 했었다. 그래서 요즘은 나를 웃겨주는 사람들이 제일 좋다. 또 예순이 넘어서 부터는 사치를 하려고 작정을 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 작가와 일하겠다는 결심이 내겐 사치다. 예전에는 먹고 살아야 되니 들어오는 작품들을 했지만 이제는 하고 싶은 작품 하면서 사치하려고 한다.
연기 인생 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왔다. 아무래도 TV보다는 영화 속에서 좀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TV니 영화니 편가르고 싶지는 않다. 연극이든 영화든 TV드라마든 잘하는 사람은 다 잘한다.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그런 것 보다 여기저기 넘나들면서 크로스오버 하면 안되나? 나는 TV드라마를 좋아한다. 어려웠던 시절에 드라마 하면서 돈 벌어 두 아이를 키웠으니까.

이번에 작품을 하면서 고민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연기나 인생에 관해서도 여러 생각이 들었을 것 같은데.
재미없는 얘기일텐데. (웃음) 이제 나이가 일흔이니까 정리해야 될 때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옛날 같으면 뒷방 할머니일텐데 아직까지 이렇게 일한다는 게 참 축복이다. 언젠가 내가 이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오면 이런 자존감이 없어지게 되겠지. 윤여정이라는 배우로 살아온 세월이 길기 때문에, 그게 없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한다. 하지만 해결이 나지 않는 고민이다. 죽음에 관해서도 친구들과도 얘기를 나눴다. 어떤 친구는 아직 괜찮은 나이인데 왜 벌써부터 죽는 얘기를 하냐고 하는 반면, 어떤 친구들은 정신이 멀쩡할 때 미리 준비해놓자고 하기도 한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내 바람이 있다면 국가가 모든 죽음을 도울 수는 없을 테지만, 이렇게 노인들이 빈곤으로 내몰려 비참하게 죽는 상황만큼은 여러분 세대에서는 막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 없겠지만, 영화라는 수단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 글_류지연 기자 (jiyeon88@movist.com 무비스트)
사진제공_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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