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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박한 영화제 하나쯤은” 무주산골영화제 조지훈 프로그래머
2018년 6월 22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주= 무비스트 박꽃 기자]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라북도 무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맡기면 2시간 40분에 걸친 잔잔한 풍경 여행이 시작된다. 빠르게 지나는 창 밖 그림을 그럭저럭 즐기다가 나도 모르는 새 스르륵 잠이 드니, 예상했던 것만큼 오래지 않은 사이에 무주 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 발을 딛고 몇 걸음만 걸으면 산 능선을 뒤로한 채 한적하게 흐르는 남대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를 가리는 복잡한 건물과 숨쉬기 버거운 메케한 공기에 지친 관객 입에서 ‘좋다’ 소리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무주산골영화제는 그런 ‘산골’에서 열린다. 벌써 6년째다. 상영작을 선별하는 건 줄곧 조지훈 프로그래머의 몫이었다. 정성스러운 프로그래밍을 알아봐 주듯,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그리 멀지도 않은 무주로 이제는 심심찮게 관객이 모인다. 등나무가 울창한 야외극장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모여 앉은 이들은 대형 스크린에 영사되는 영화를 보며 맥주를 들이켜고, 종종 크게 소리 내 웃으며 손뼉 친다. 도시의 극장에서 지켜야 할 ‘조용히 모드’도 필요 없다. 정시 입장, 정시 퇴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조지훈 프로그래머는 말한다. 그저 숲속으로 소풍 가듯, 함께 모여 소박하게 영화제를 즐기면 된다고 말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일대에서 진행되는 소규모 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가 올해로 여섯 해를 맞았다. 전주국제영화제라는 비교적 규모 있는 영화제에서 12년간 몸담았던 당신이 1회부터 지금까지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다.
무주는 군민이 2만 5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시골이 다 그렇지만 원체 고령자가 많다. 인구 소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위험지역이다.(웃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전주 인구가 65만 명쯤 되는데, 땅 면적만 놓고 보면 무주가 그보다 세 배쯤 넓다고 하더라. 이런 곳에서 영화제를 한다니… 처음에는 상상이 안 됐다. 고민이 참 많았다.

관객이 찾아주지 않을까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영화제를 준비하러 무주에 처음 왔는데 밤이 되니 숙소 근처에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낮에도 딱히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과연 여기에서 영화제를 할 수 있을까? 한다면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다른 영화제와는 좀 다르게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올해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사진전, 책방, 여러 뮤지션의 공연까지 여러 문화 프로그램 같은 것들 말인가.
대도시에서 진행하는 영화제에 참석한 관객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거리를 걷는다든지 여러 할 거리가 많다. 하지만 무주에서는 그렇지 않다.(웃음) 남대천을 넘어 읍내까지 걸어 가볼 순 있겠지만 이동이 쉽지 않은 편이고 셔틀버스도 행사장 위주로만 다닌다. 영화제를 찾은 관객이 영화가 상영하지 않는 시간에도 무언가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싶었다. 당인리 책발전소와 협업한 ‘산골책방’이 위치한 등나무운동장은 특히 관객이 휴식하기에도 매우 좋은 곳이다.

관객 입장에선 전라북도 무주 하면 상당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영화제가 아니라 여행을 오는 느낌이랄까.(웃음)
특히 서울에서 많은 관객이 찾아 주시는데, 실제로 와보면 그리 멀지 않다고들 한다. 심리적 거리감이 가장 큰 것 같다. 물론,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우리도 물품 하나 구입할 때는 전주에 있는 큰 마트까지 가야 하는데 관객은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그래서 셔틀버스도 준비하고 카쉐어링 서비스도 마련했다. 아마 그래도 여전히 불편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관객에게 이렇게 말씀드린다. 좀 느릿느릿 움직이면 어떠냐고.(웃음) 빨리빨리 움직여야 하는 도시와는 또 다른 시간을 보내보는 건 어떠냐고 말이다.

기쁘게도, 여섯 해째를 맞으면서 관객 사이에서 영화제에 대한 입소문이 난 듯싶다. 영화제 근처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는 한 달 전부터 예약이 꽉 찰 정도라고 들었다.
영화제 인지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는 걸 체감한 건 메르스 사건이 있던 해다. 각종 행사가 취소됐고 우리 영화제도 취소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어찌어찌 개막을 했는데, 아무도 안 올 거라는 예상을 깨고 상당히 많은 관객이 찾아주셨다. 그 뒤부터 지난해까지 꾸준히 관객이 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줄을 서서 영화 입장을 기다리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영화제와 달리 전 세계 최초 개봉 작품보다는 이미 국내 극장가나 IPTV를 통해 공개된 작품을 ‘재상영’한다. 게다가 모든 영화가 무료 상영이다.
규모가 큰 영화제처럼 프리미어 상영(기자 주: 전 세계 최초 상영)을 고집하거나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은 해외 작품을 상영하려면 영화제를 치르는 비용이 매우 커진다. 예산도 없을뿐더러, 설사 그런 영화를 상영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여기까지 와서 그걸 봐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극장에서 개봉한 작품만 무려 500여 편이다. 개봉작이 너무 많아 관객은 어떤 작품이 극장에 올랐는지도 다 알기 어렵다. (상영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때로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극장과 시간을 맞춰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미 개봉한 작품을 잘 골라서 관객에게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영화제의 장점이 될 수 있겠다 싶더라.
그럼에도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2017)를 연출한 안드레아 아놀드 특별전 등 영화 마니아를 위한 프로그램도 몇몇 눈에 띈다.
프로그래머는 누가 이 영화를 볼 것인지 생각하며 상영작을 결정한다. 낮 시간대에는 무주 군민이나 어르신들도 편하게 볼 수 있는 가족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배치하는 한편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분들이 볼 수 있는 작품도 어느 정도 골라 비율을 조정하는 편이다. 올해부터는 조금 더 전문적인 변화를 주고 싶어서 ‘무주 셀렉트’라는 섹션을 신설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시대 감독 중 가장 주목받는, 그리고 앞으로 더 좋은 작품을 만들 것 같은 감독을 딱 한 명만 뽑기로 했다. 올해는 안드레아 아놀드다.

모든 영화가 상영 도중 입장하거나 퇴장하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다. 굉장히 자유로운 운영이다.
내가 가본 유럽의 영화제에서는 정시 입장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는 상영 시작 이후 사람이 오고 가면 극장 구조상 영사를 방해하거나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문화가 생긴 거다. 옆 사람의 관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할 때는 오히려 그 문화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예컨대 어떤 어려움인가.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1분 단위까지 다 확인이 가능하지만 (손목시계를 주로 사용하던) 옛날에는 시간 개념이 지금 같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에서 전주까지 왔는데 5분 늦었다고 입장을 못 하게 하는 게 말이 되냐는 항의부터 시작해 멱살 잡히는 일까지 있었다.(웃음) 무주산골영화제에 와서는, 어차피 영화 상영도 무료인데 모두들 좀 더 편안하게 영화를 보면 어떨까 싶었다. 영화는 어차피 같이 보는 것 아닌가. 옆 사람의 조그만 소리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함께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매년 영화제 상영작을 결정하려면 수도 없는 영화를 봐야 하겠다. 영화는 얼마나 보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하루에 세 편부터는 질리더라.(웃음)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다.(웃음) 해외 영화잡지에서 최고로 꼽은 작품을 모두 모아 5~600편에 달하는 작품 목록을 만든다. 전주에 있는 우리 영화제 사무실에 가면 벽면에 큰 전지를 붙여놓고 각 섹션에서 상영할 만한 작품 제목을 포스트잇에 써 붙여 둔 게 있다. 그중에서 우리 극장가에서 개봉했거나 IPTV를 비롯한 디지털 시장에서 공개된 작품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작품을 이렇게 조합해보고 또 저렇게 조합해보기도 한다. 영화제에서 상영할 작품 목록을 조금씩 좁혀 나가는 거다. 첫해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갈수록 힘든 작업이 되고 있다. 수입되는 영화도 너무 많고, 디지털 시장으로 바로 가거나 일부 IPTV에서만 독점 서비스하는 작품도 있어서 작품을 검색하기가 쉽지 않다. 거의 ‘추적’해서 다운로드 받는 식이다.(웃음)


그런 과정을 거쳐 올해 특히 주목하고 있는 작품 몇 가지가 있을 것 같다.
‘판’ 섹션 중에서 IPTV 등 디지털 시장으로 직행한 해외 극영화 네 편이 있다. 켈리 레이차드 감독의 <어떤 여자들>(2016),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스튜던트>(2016), 토마스 바실레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빠진 여자>(2016) 그리고 <아, 황야>(2017)다. 키시 요시유키 감독의 <아, 황야>는 배우 겸 감독인 양익준이 출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러닝타임이 305분에 달한다.(웃음)

음… 너무 길어서 관람이 망설여진다!(웃음) 영화제 운영 인원이 10명 내외인 데다가 프로그래머는 당신 혼자다. 힘에 부치지 않는가.
영화를 열심히 보는 사람도 많이 줄었고, 영화 전문지 아니고서야 영화제 소식을 다루는 언론도 많지 않다. 옛날만큼 영화 한편이 이슈가 되는 시대도 아니라서, 아무리 신경 써서 프로그래밍을 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알아줄까 싶을 때도 있다. 어차피 이 작품을 틀든 저 작품을 틀든 관객 입장에서는 큰 차이도 없는데 난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싶을 때도 있다.(웃음)

워낙 규모 있는 영화제에 오래 몸담았다. 한정된 자원으로 꾸려나가야 하는 무주산골영화제를 준비하며 버려야 할 것도 있었고, 그럼에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도 있었을 텐데.
(한치 망설임도 없이) 버린 건 욕심.(웃음) 그래도 한국에 이런 영화제 하나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 있는 영화제이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다. 아, 나도 잘 모르겠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웃음)

그래도 노력에 대한 보답을 받은 때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본다.(웃음)
지난해에는 영화제를 찾아준 관객이 너무 많아 정식 좌석이 아닌 바닥과 계단에 앉아 영화를 보는 분들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천안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무주까지 왔으니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서서라도 보겠다는 관객까지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관객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이 뿜어내는 따뜻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 사람들, 도대체 뭘까?.(웃음) 그럴 때, 어쩌면 내가 하는 일이 꽤 의미 있는 걸 수도 있겠다 싶다.

이쯤에서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프로그래머는 관객이 욕망이 무엇인지 상상해보고 그것들을 모아서 하나의 그림을 펼쳐 보여주는 사람이다. 마치 큰 지도를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가 차지하는 비중은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나머지는 행사가 잘 돌아가게끔 해주는 사람들의 몫이다. 관객은 대개 좋았던 영화를 기억하지만, 그들이 영화제에 와서 아무 불편 없이 잘 즐기고 돌아갔다면 그건 스태프들이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머와 스태프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것도 내가 해야 할 하나의 역할이라고 본다.

다큐멘터리 창작자와 투자처를 이어주는 인천다큐포트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영화제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 등 산업 측면에서 관심도 높은 편으로 안다.
아직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무주산골영화제에서도 영화 제작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다.(웃음)

역시 뭔가 있었군! 기대하겠다.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소소하게 행복한 순간은.
프로그래머 일을 오래 하면서 느끼는 건, 대한민국의 모든 영화제는 수없이 많은 영화제를 거쳐온 스태프의 땀과 눈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거다. 작은 영화제에서 일하다 보니 인력이 충분치 못해서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많은 편이다. 그런 와중에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기분이 좋다.

스태프를 좀 웃겨 주는 편인가.
아니, 주로 웃는 편이다.(웃음)



2018년 6월 22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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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 박꽃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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