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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인 듯 아닌 듯 허진호의 진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허진호 감독
2020년 1월 21일 화요일 | 박은영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박은영 기자]

허진호 감독이 익히 잘 알려진 역사 속 두 인물 ‘세종’(한석규)과 ‘영실’(최민식) 이야기 <천문: 하늘에 묻는다>로 돌아왔다. 역사와 실존 인물에 기반해 상상력을 덧대 허진호식 감성으로 완성한 <덕혜 옹주>로 대중적으로 큰 사랑을 받은 지 근 3년 만이다. 조선의 독자적 시간과 하늘을 열고자 했던 두 천재 세종과 장영실은 종종 다뤄졌던 소재기에 일정 부분 예상 가능한 변주를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허 감독은 군신의 의리, 우정 나아가 브로맨스까지 다채로운 감정을 꺼내 들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진득한 결로 펼쳐낸다. 색다르지만,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천문>. 허진호 감독 서사의 또 다른 확장이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의 첫 출발이 궁금하다.
장영실의 이름을 딴 상과 학교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인데 막상 살펴보면 기록이 많지 않다. 그 정도의 업적을 쌓은 자가 왜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졌을지 그 의문이 시작이었다. 필요한 과학 기구를 발명했으니 과연 세종이 용도 폐기하듯 영실을 버렸을까. 신하를 아꼈다는 평소 세종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지 않나. 무언가 이면의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캐스팅에 고심했을 것 같다. 최민식, 한석규 두 배우를 염두에 둔 까닭은.
일단 힘 있는 배우여야 했다. 자연히 최민식과 한석규 두 배우가 떠올랐고, 평소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기에 특정 역할을 한 배우에게 먼저 제안하기보다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시에 만났다. 한석규 배우는 드라마를 통해 이미 강렬한 세종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 마이너스가 될 수 있었다. 또 두 사람이 두 살 차이라 최민식 배우가 세종을 맡는다면 나이 들어 보이는 약점이 있었다. 사실 결정을 못 하겠더라.

의도대로 된 건가. (웃음)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만일 역할이 바뀌었다면 사뭇 다른 결이 됐을 거다. 솔직히 최민식 배우의 세종과 한석규 배우의 영실도 보고 싶다. 우리 이야기에 좀 더 갈등구조가 많았다면 그 조합도 좋았을 거다. 영실의 세종을 향한 마음은 거의 사미인곡 수준이라 지금의 조합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전작 <덕혜옹주>(2016)가 대중적으로 성공했으나 일각에서 역사 왜곡과 인물 미화라는 시선도 있었다. 그만큼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게 조심스러우면서도 힘든 작업인데 이번에도 역사극이다. 사극의 매력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힘이다. <덕혜옹주>는 근현대사를 다뤘기에 본격적인 시대극은 <천문>이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사극은 아무래도 대사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내가 쓰고 싶은 대사가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또 현장에서 변주를 즐기는 편인데 사극의 경우는 의상과 세트 등을 모두 완벽히 준비한 후 촬영에 들어가니 이후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이런 점들 때문에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완성한 후에는 역사극이 가진 힘이 실감된다.

<천문>을 만들며 가져간 큰 방향성은.
단순히 역사를 재현하는 것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 그 경계에 대해 고민하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 했다. 또 약간의 미스터리함을 가지고 갔고 그로 인해 영화적 긴장감을 주고자 했다.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것들 말이다. 이번엔 자료조사 특히 과학적 지식을 요한 장면이 많아 이과적 머리(지식)가 필요했다. (웃음) 1442년 장영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간의대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명나라의 눈으로부터 숨기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당시 하늘을 관측한다는 것은 현대로 치면 굉장한 무기요 핵심 기술일 수 있으니 말이다. 시대극이 자료를 조사하고 단서를 잡아 상상해서 만드는 것은 맞지만, 단순히 상상에 의지할 수는 없다. 당시의 배경과 기록을 근간으로 상상을 덧대야 한다.

영화가 미술, 의상, 음악 등 서사 외적인 부분도 매우 훌륭하더라. 아무래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놓칠 수 있는데 주목할 포인트를 소개한다면.
간의대 제작에 공을 많이 들였다. 지을 장소를 결정하는 데 오래 걸렸고 결국 궁궐 안에 짓는 거로 했다. 그리고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의 사이즈를 키워 보다 극적인 효과를 주고자 했다.

명장면을 꼽는다면.
만드는 입장에서 하도 많이 봐서 지겨운 부분이 있는데 볼 때마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풍지 신이다. 문풍지를 검게 칠해 밤하늘 삼고 구멍을 뚫어 등불을 비춰 마치 밤하늘 별 보기 같은 효과를 낸다. 원래 문풍지를 뚫는다 정도로 예정하고 촬영에 들어갔으나 흰 종이 바탕 위에는 불빛을 살릴 수 없다고 하더라. 배우들과 얘기하다가 장영실이 뭔가 천재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아 검게 칠하게 된 거다. 세종이 별을 더 보고 싶다고 하니 영실이 아이디어를 낸 거지. 게다가 최민식 배우가 <취화선>(2002)에서 ‘장승업’을 연기한 덕분에 붓 잡는 폼이 남달라 더 살아난 것도 있다.

<덕혜옹주>와 이번 <천문> 사이 단편 <두개의 빛: 릴루미노>(2017)와 <선물>(2019)을 제일기획과 협업으로 선보였다. 그때마다 영화 촬영의 즐거움을 재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영화 일에 대한 피로감 혹은 규모로 인한 부담감이 작용한 건가.
그렇지 않다. 연달아 사극을 하다 보니 그런 느낌이 들었다. 원래 촬영 현장에서의 변주를 즐기는 편이다. 현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이야기와 창의성이 있거든. 하지만 (좀 전에 잠깐 언급했듯) 사극은 하나하나 다 짜고 맞춰 들어가야 해서 현장에서 유연한 변용이 힘들다. 그래서 갑갑하던 차에 단편을 찍으며 촬영 재미를 다시 맛본 거지.

장편, 단편 등 영화 작업을 수십 년 이어가고 있다. 고되고 힘들 때마다 당신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무얼까.
이런 생각을 한다. 예전 <행복>(2007)의 수상소감으로 말한 적이 있는데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그나마 행복한 것 같다. ‘그나마’라고 표현하니 좀 부정적으로 들리나.(웃음) ‘가장’의 뉘앙스로 생각해 달라. 영화감독이 영화를 찍지 않고 있으면 거의 반백수 거든. 그래서 찍을 때 행복하다.

수년째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영화 작업 외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인데 영화제를 통해 받는 에너지 혹은 보람이 있다면.
<천문> 음악을 맡은 조성호 음악감독이 거의 만들다시피 한 영화제라 그 인연으로 집행위원장으로 함께 하고 있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영화제는 영화 촬영, 즉 감독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 사무국장, 프로그래머, 여러 스태프 등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성격이 좀 더 강하다. 물론 영화도 그렇지만 그해의 영화제를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하고 협업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에너지와 팀웍에서 오는 소통이 주는 기쁨이 크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을 필두로 <봄날은 간다>(2001), <선물>(2007) 그리고 <덕혜옹주> (2016)까지 때론 ‘멜로 장인’으로 불리기도 하는 등 고유의 작품 세계를 지닌 손꼽히는 감독 중 한 명이다. 당신의 영화를 관통하는 결 혹은 분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음, 분명 정서가 있기는 한데 어떤 정서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뭔가가 있고 그걸 영화 속에 가져가려고 한다. 또 그런 정서들이 나오는 장면을 좋아한다.

이번 <천문>에서 해당 장면을 꼽는다면.
이번엔 문풍지 시퀀스와 옥사의 지붕이 무너지며 그 사이로 밤하늘을 보는 장면이다. 위중한 상황에서도 별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찌 보면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해학적이지 않나.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확산 등 극장 위주의 전통적인 영화 상영 플랫폼이 급변하고 있다. 감독 입장에서 변화를 실감하나. 향후 협업 가능성은.
당연하다. 단편 <두개의 빛: 릴루미노>와 <선물> 모두 유튜브로 공개했고 소통하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처음엔 유튜브 공개가 낯설게 느껴져 순간 내가 영화를 찍는 거냐는 생각이 들면서 과연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되더라. 결론은 보이는 형식이 다를 뿐 영화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었으니 영화라는 거였다. 또 기회가 온다면 협업하고 싶다.

차기작 소개를 부탁한다.
아직 구제적으로 밝히긴 힘들고 준비 중인 게 몇 개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최근 관심거리와 소소한 행복이 있다면.
요즘 세상이 참 수상해 영화 속에 어떤 이야기로 녹여볼 수 있을지 생각한다. 사실 별다른 취미 생활이 없는 편이라 주로 TV 당구 중계를 즐겨 본다. 스무 살 이전, 어릴 때 당구를 참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다시 치니 재미있더라.


2020년 1월 21일 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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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광희 실장(Ultra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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