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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가지 않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길 <무녀도> 안재훈 감독
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 박꽃 기자 이메일

[무비스트= 박꽃 기자]


안재훈 감독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말한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 <소나기>(2017)에 이어 또다른 국내 단편 문학인 김동리의 <무녀도>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말랑한 판타지를 제공하고 귀여운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해외 상업 애니메이션의 흔한 미덕을 일정 부분 거스르는 듯한 작업을 맡아온 지난 시간이다. 디지털 작업이 일상화된 시대에 직접 연필로 종이에 밑그림을 그렸다는 아날로그 방식이 그의 어떤 철학을 짐작케 할 뿐이다.

<무녀도>를 통해 안재훈 감독은 시대적 효능을 다 해가는 무당 ‘모화’의 의미를 새롭게 찾아내고,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기독교의 하느님을 마음에 품게 된 아들 ‘욱이’의 존재를 묘사한다. 제작 과정에만 8만 장의 그림이 투입됐다. 오래된 문학 속 낯선 문장은 뮤지컬 음악을 통해 보편적인 언어로 탈바꿈했다. 미국도 일본도 아닌 우리 애니메이션만의 고유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탐구했던 과정, 안재훈 감독은 그 순간들의 오묘한 재미를 <무녀도> 제작의 기쁨으로 꼽는다.




김동리 단편 문학 ‘무녀도’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모화’는 만신 이해경에 자문, ‘낭이’는 김연아에게 영감



그동안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왔다. <무녀도>도 그 연장 선상의 작품이다.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의 방향은 ‘남들이 가는 길’과 ‘남들이 가지 않는 길’, 두 가지로 나뉜다. <무녀도>를 비롯한 단편 문학 애니메이션은 후자다. 원래 계획은 1년에 한 편씩 만들어서 독립영화 전용관에서 상영하는 거였는데 다른 작업도 같이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 제작 기간을 딱 잘라 말할 순 없지만, 대략 1년 반 정도 걸린 것 같다.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무녀도>는 새로운 시도였다. 시나리오도 애니메이션 버전, 뮤지컬 버전 두 가지가 있었다고 들었다.
뮤지컬 경험이 많은 작가님이 뮤지컬용 대본을 써 주셨는데 처음에는 그걸 가지고 어떻게 작업을 해야 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웃음) 움직이는 입 모양을 캐릭터와 완벽하게 맞추는 것도 어렵게 느껴졌고… 임기응변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니 굉장히 당황스럽더라. 뮤지컬 일을 하는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공연도 여러 차례 보러 가면서 처음부터 배워나갔다.

무당 ‘모화’가 굿을 하는 장면에서 고어에 가까울 정도로 낯선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목소리 연기한 소냐 배우의 카리스마 있는 음성과 주술적인 음악의 분위기가 잘 맞물리면서 상황과 맥락이 무리 없이 이해되더라.
원작 소설을 보면 ‘모화’가 하는 말은 대사도 아니고 지문도 아닌, 복잡한 것들이 많다. 그걸 다 말로 만들어서 전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았는데, 뮤지컬로 장르 안에서 노래 가사로 전달해버리니 오히려 쉽게 해결되더라. 강상구 음악 감독과는 말로 상처받을 사이는 이미 지나서(웃음) 솔직하게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많이 나눠가며 작업했다. 스태프와 다 같이 만신님의 굿을 보러 가기도 했다. 특히 이해경 만신께서 자문에 많이 응해주셨다.

굿하는 움직임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나. 워낙 화려한 동작이라 표현하는 데 있어 애니메이터들의 고초가 컸을 것 같다.
‘모화’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측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다.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니, 지금까지 나왔던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이 될 것 같고… <무녀도> 자체의 그림체가 사실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면에서는 한계도 있었다. 한편 ‘모화’의 딸 ‘낭이’ 경우에는 김연아 선수가 쇼트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화장법을 떠올리려고 했다. 무표정인 듯 처연해 보이는 느낌을 연상하며 만들었다.


 '낭이'
'낭이'

여성 직업인 ‘모화’ 정성껏 재해석

매수와 컷 조율은 영원한 숙제, 아류 되긴 싫어



원작에서 생략한 내용이 있는가 하면, 새로 넣은 문장도 있다. ‘모화’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곳곳에 삽입됐는데, 똑똑한 아들과 어여쁜 딸을 뒀으니 키우는 맛이 있을 거라는 식이다. 어떤 의중인지 궁금했다.
그 점을 봐줘서 고맙다. 처음 <무녀도>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고 할 때는 사라져가는 것과 새로 부흥하는 것의 대립 정도의 이야기로 봤다. 그런데 살펴보니 그 안에 다른 이야기도 많더라. 특히 무녀에 대해 연구할 수록, 여성 직업인에 대한 당시 사회의 한계가 느껴졌다. 나도 남성 중심 사회에서 교육을 오래 받았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쌓여 있는 비슷한 인식이 있을 것이다. 어릴 때 동네에 사는 무녀를 두고 “밤에 남자들이 몰래 드나든다”는 식의 이야기가 너무나 쉽게 오갔던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유한 직업을 가진 여성을 폄하하는 손쉬운 장치였던 거다.

그럴 수 있겠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무녀도> 속 ‘모화’를 보니 그 존재가 너무 아프게 느껴지더라. 그래서 ‘모화’의 상황과 그의 직업에 대한 새로운 묘사를 넣어야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지니고 작업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은연중에라도 여러 복합적인 메시지를 느끼셨으면 했다. 고요한 객석에 혼자 앉아 관람하는 영화라는 특성상 그 경험이 누군가의 생각을 바꿀 만한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본다.

 '욱이'
'욱이'

영화 도입부에서 ‘모화’를 클로즈업하는 롱테이크 신, ‘모화’가 부엌에서 ‘욱이’에게 칼을 들이대는 클라이맥스 신 등 품을 많이 들인 장면이 여럿이다. 모두 연필로 직접 밑그림을 그리는 2D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작업했다고 들었다.
첫 시퀀스에 들어간 그림만 몇 천매 된다. <무녀도> 전체 분량은 8만 장 정도다. 아마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접근했다면… 거의 한 애니메이터를 죽이는 일이었을 것이다.(웃음) 그만큼 작업량이 많았으니까. ‘모화’가 부엌에서 칼춤을 추는 시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인데,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이 끝난 뒤에는 호불호가 좀 갈리기도 했다.

어떤 이유 때문인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컷을 나누지 않았다. 방송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당시 스태프들에게 한 장면에 여러 매수를 넣고 컷과 컷을 자주 나눠서 속도감 있게 만들어보자고 했는데, 해보니까 역시 미국 쪽 애니메이션 아류가 된다는 걸 본인들이 느끼더라. 우리 작품이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제작해서 (이미 익숙한) 재미를 주기보다는 눈썰미가 없는 사람도 그 차이를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도록 (소신껏) 만드는 게 낫다 싶었다. 아마 애니메이터라면 금방 알 것이다. 1분 이상 넘어가는 롱테이크 신이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는 건 애니메이터가 몇백 장의 데생을 계속해서 해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걸.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대변되는 속도감 있는 작품에 워낙 익숙해져 있으니,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낯설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한 장면에서 매수를 너무 많이 빼고 선을 줄여버리면 어딘지 모르게 작화가 부족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잘못하면 일본 쪽 애니메이션의 아류가 될 수도 있고. 그 균형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숙제다. K라는 말을 붙이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작업했을 때 완벽히 새로운 ‘K-애니메이션’이 되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해 나가야 할 일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을 탐구해 나가는 애니메이터가 재미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수상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상영했는데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정을 했다고 들었다. 언론시사회 당시 영화제 버전을 본 관객은 안 본 것과 다름없을 정도라고 했는데, 어떤 점이 가장 변화했나.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일본인 화가들이 자신들이 통치하는 조선을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게 하려고 당시를 미화 시켜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게 됐다. 실제 백성들은 ‘옷’이라고 할 것도 없었고 그다지 화려하게 살지 못했다고 하더라. <무녀도> 작업 당시 이런 점에 있어 잘못된 판단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태프의 동의를 구해 군중의 모습을 싹 다 고쳤다. 백성들에게서 ‘색’을 다 뺀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흰색은 잘못 쓰면 안 예쁘게 보일 수가 있는데 그런 색감까지도 다시 한번 살폈다. 그 외에도 뮤지컬 시퀀스를 보완했고, 그에 맞춰 배경도 수정했다.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 핵심은 공동작업

신작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 <아가미> 선보일 것



<무녀도>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의 인원이 투입됐나.
종종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를 만화 작업실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 사무실에 한두 명쯤 있을 줄로 알다가, 막상 와보면 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냐고들 한다.(웃음) 내부에만 13~4명 정도의 인원이 있다. 우리와 같이 일하다가 개인 작업을 하기 위해 나갔거나 다른 회사 일감을 받고 있는 프리랜서분들도 5명 정도 됐고, OEM 제작을 맡긴 중국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도와주시는 2~30명 정도의 스태프들도 계셨다. 중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는 어떻게 하면 OEM으로 엮인 관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고민했고, 우리가 직접 상해로 MT를 가서 그쪽 스태프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인원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각자가 맡은 역할은 완벽하게 세분돼 있지만, 그 공정을 교류하고 가감없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구조만큼은 오랜 세월에 걸쳐 갖춰 놓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끼리 쓰는 표현 중에 ‘수술한다’는 말이 있는데, 한 사람이 그린 걸 다른 사람이 보면 단점이 보이게 마련이고 고칠 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럴 때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한다. 주로 메신저를 이용해 의사소통을 하는데 한 사람이 그림에 대한 의견을 구하면 다른 사람이 직접 대안을 그려서 보내주기도 한다.

 안재훈 감독의 닉네임 '흙 묻은 손'
안재훈 감독의 닉네임 '흙 묻은 손'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은 어떤 이들인가.
과거에는 다들 우리 스튜디오에 기술을 배우러 왔다. 여기서 기술을 잘 배우면 다른 어딘가에 가서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함께 하는 분들은 안재훈 감독이 어떤 작품을 만들고, 어떤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알고 직접 찾아온 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1세대’다. 대부분 20대에서 30대 초반으로 젊지만 나와 함께 장편만 4개째 만들어냈으니 그 역사가 결코 짧지는 않다. 이제는 함께 일하는 관계도 좀 견고해진 것 같다. 다들 성격은 굉장히 내성적인 편이고, 일반 직장인으로 보면 적절치 않은(웃음) 사람도 많지만 자기 작업에 관해서는 굉장히 오픈돼 있고 서로를 완벽하게 존중할 줄 안다. 3~4년째 퇴사율이 제로다.

수 년간 퇴사율 제로, 놀랍다.(웃음)
언젠가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구누구 씨는 애니메이션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어봤는데, 갑자기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가 끝나는 순간 자기 애니메이션 인생도 끝난다고 해서… 농담이 다큐가 되는 순간이었지만(웃음) 나로서는 나와 일하는 걸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정말 행운이다.

 신작 '아가미' 작업 중
신작 '아가미' 작업 중

다음 선보일 작품도 이미 준비돼 있는 거로 안다. <무녀도> 이후에 공개할 작품들부터는 3D 방식으로 제작한다고 들었다.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은 이미 작업을 다 했고 <아가미>까지 진행 중이다.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은 깜깜하고 무서운 분위기의 작품인데 다행히 길을 잘 찾았고, 좋아하는 가수 분과도 작업하기로 이야기가 됐다. 그분의 음성과 노래가 작품 안으로 들어오면 엄청난 감성을 지닌 영화가 완성될 거다. <아가미>는 두말할 것 없는, 구병모 작가님의 소설이다. 스태프들이 작품을 보자마자 ‘이건 우리가 잡아야 한다’고 했을 만큼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원작의 배경을 서울에서 프랑스로 바꿨고, 주인공은 정우성 씨를 생각하면서 그렸다. 자기가 잘생긴 걸 알면서 짓는 표정 같은 걸 떠올리면서.(웃음) 그러다가 이쯤에서는 이정재 씨의 목소리가 들어가면 어떨까? 연상하기도 했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세상에 없는 캐릭터를 만들어낼 것이다.

<무녀도>와 앞으로 나올 신작이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길 바라나.
지금은 OTT의 시대지만, 다시 극장의 시대가 돌아왔을 때 그 작품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건 이런 거구나’를 느꼈으면 한다. <살아오름: 천년의 동행>과 <아가미>는 한국 애니메이션 속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여주게 될 만한 작품인 만큼, 더 잘 해내고 싶다.

사진_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2021년 11월 26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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