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유럽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비엔나에서 14시간의 짧은 데이트 후, 6개월 뒤를 기약했던 제시와 셀린느를 다시금 기억하는 건 지나간 20대 청춘의 시절을 끄집어 내는 과정과도 같았다. 헤어진 후, 각자 공항버스와 열차에서 떨리는 감정을 누르던 그들을 보면서 나 또한 떨렸던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6 개월 후에 과연 그들이 만났을까? 만났다면 연인의 관계를 지속했을까...?
90년대 중반 유럽 배낭여행의 지침처럼 받들어졌던 <비포 선라이즈>를 바라보면서, 사랑을 논하며 쉼없이 써내려갔던 그들의 후일담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 아쉬워하기에는 이르다. 그로부터 제시와 셀린느와 함께 우리들에게도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청춘을 관통해가는 우리 삶의 한켠에는 추억이라는 것이 항상 공존하고 있음을 <비포 선셋>을 통해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추억은 추억할 때만이 가장 아름답다지만, 추억의 시간들을 현실로 끄집어 내는 것이 또 다른 추억을 쌓아가는 것이라면 <비포 선셋>에서 9년만에 제시와 셀린느가 만난다는 것은 분명 삶의 기쁨일 것이다.
비엔나의 추억을 소설로 엮어 출판한 제시는 유럽 홍보투어 중에서 잠깐 파리에 머물게 되고, 파리의 한 서점에서 출판기념 회견 중에 셀린느를 만나게 된다. 자신을 모티브로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아는 셀린느는 제시를 보기 위해 그리고 제시는 소설을 씀으로써 셀린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에 둘은 운명적 재회가 가능했을 것이다.
9년만에 만나는 느낌...! 정말 그 느낌이 그대로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를 바라본다.
<비포 선라이즈>에서는 14시간의 만남이더니 이번엔 제시가 홍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러가기까지 80분 남짓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9년을 헤어져서 보냈던 그들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시간이다.
하지만, 9년 전의 추억들이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것처럼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다만 서로에게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세월의 흐름만큼 그들의 삶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변화된 부분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20대에 인생과 사랑과 철학을 쉴세없이 이야기하던 제시는 다만 조금 과묵해졌고, 환경운동가인 셀린느는 현실에 대한 문제점들을 발산하는 열혈 여성운동가가 되었다는 것만 빼면, <비포 선셋>은 전작인 <비포 선라이즈> 취했던 것처럼 여전히 삶과 로맨스를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성을 잃지않는 사려깊은 대사들을 뿜어낸다.
그리고 영화는 아무런 영화적 장치나 배경음악도 없이 단지 스테디캠만으로 두 주인공을 따라가면서 영화의 러닝타임인 80분을 거의 리얼타임처럼 이용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느가 아름다운 비엔나의 풍광을 스치듯 지나갔다면, <비포 선셋>에서는 파리의 뒷골목과 이름없는 카페만을 비춰줄 뿐이다. 그나마 세느강 유람선의 풍경마져도 관광객들이나 타는 거라면서 한 마디 하는 셀린느의 대사에서 현실성이 부여된다.
80분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그렇듯, 제시와 셀린느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짧게 느껴졌다. 헤어지기 전 셀린느가 제시에게 기타를 치며 불러주는 'Let me sing you a waltz'의 멋진 연주에 취해있을 때, 곧바로 Nina Simone의 'Just in time'에 맞춰 알듯 모를듯한 웃음을 지으며 춤을 추던 셀린느의 모습을 뒤로 영화가 끝났을 때 난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한번 제시와 셀린느의 후일담을 내 스스로 써내려가야 하는 것임을 말이다.
여전히 <비포 선라이즈>를 생각하면 떨리고, 9년 뒤 지금의 <비포 선셋>을 통해 다시한번 인생의 경험을 귀중하게 여기게 된다.
이 두편의 영화처럼 사랑의 감정, 청춘의 떨림과 열정 그리고 삶의 무게를 정확히 꿰뚫어내는 영화는 그리 흔치 않을꺼다. <스쿨 오브 락>이라는 영화로 흥행 감독의 대열에 까지 올라선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비포 선라이즈>을 연출했던 9년 전으로 다시금 돌아가 소품처럼 작은 영화(하지만 존재감있는 영화)를 만들어냈고, 속편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멋지게 날려버렸다.
제시역의 에단 호크와 셀린느역의 줄리 델피는 세월의 흐름은 속일 수 없었지만, 9년이라는 그 세월의 흐름속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데 성공했다. 우마 서먼과 이혼의 그늘과 소설을 출판했던 에단 호크와 그리고 여전히 미혼여성으로 살고있는 줄리 델피 본인의 경험들이 연기에 녹아흐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두 배우가 나누는 대사하며 행동들은 정말 연기가 아닌 실제로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이미 제시와 셀린느가 되어있었고 그들의 솔직한 장면과 대사는 내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다.
나도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로 동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적지않은 홍역을 치룬 느낌이다.
불완전한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은 여전히 닮은 구석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우리의 인생은 모든 시기가 질풍노도와도 같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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