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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잔을 깨뜨린 붕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vinappa 2005-05-08 오전 12:57:54 1991   [9]
    "언젠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 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그림 속의 붕어는 금붕어가 아니었다. 그 붕어의 비늘은 윤기 흐르고 탐스러운 금붕어의 것이 아니라 베네통 광고나 적십자의 헌혈 광고에 더 어울림직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새빨간 색이었다. 빨간 붕어는 자기를 구속하고 있었던 작은 세계를 깨뜨리고 이제 막 외부로 뛰쳐 나온 듯 허공에 떠 있었고, 그 빨간 붕어의 미래를 결론 짓기에는 낙관도 비관도 어울리지 않을 듯 했다. 빨간 붕어가 깨뜨리고 나온 세계는 어항도 수족관도 아닌 와인 잔이었다. 주둥이가 제법 넓은 예의 와인 잔은 빨간 붕어의 작은 육체를 가두기에 협소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빨간 붕어의 영혼과 존재 자체를 담고 있기에는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었다. 그림으로 보아 와인 잔을 깨뜨리고 허공에 떠 있는 것은 빨간 붕어의 기이한 몸이었지만 와인 잔을 깨뜨리고자 한 것은 빨간 붕어의 몸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존재였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해서 행동반경이 극히 제한된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는 본능적으로 바깥 세상을 동경하고 그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녀의 동경과 갈망을 해소하는 방식 또한 제한적이고 일방적이다. 할머니가 밀어 주시는 유모차에 웅크린 채 시야를 절반 이상 가려버리는 담요 너머로 내다보는 어둑어둑한 새벽의 거리와 할머니가 주어다 주시는 책이 그녀와 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다. 책과 새벽 정찰이 세상 엿보기의 전부인 쿠미코는 세상의 일부만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잘 안다. 왜냐하면 동경이 큰 만큼 자잘한 정보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쿠미코에게 있어 그 앎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제한된 것이라 여겨진다. 멀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뻗어 있을 것 같은 하늘, 그 하늘 아래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동경과 갈망. 쿠미코가 스스로를 자신이 탐독하는 소설 속의 인물 조제라 부르는 것은 피상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쿠미코의 세상에 대한 앎이 조제가 속한 세상과 조제를 중심으로 한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망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선택한 까닭일 것이다.

    세상에 떠도는 소문의 실체는 터무니 없이 과장되었거나 인위적으로 가공된 허위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 졸업반인 츠네오(쯔마부키 사토시)는 마작판의 손님들을 통해 정체불명의 유모차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인적이 드문 시간에 괴기하게 생긴 할머니가 끌고 다니는 문제의 유모차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범죄 집단의 은밀한 운송 수단이 되기도 하고, 죽은 손녀의 미이라를 실었음직한 괴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지만 실체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매사에 시큰둥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소재일 뿐이다. 그 단순한 호기심은 츠네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성이다. 어느 이른 아침 츠네오는 많은 사람들을 궁금증에 시달리게 한 문제의 유모차를 만나게 되고, 소문의 실상과도 조우하게 된다. 관찰자 모두를 궁금증에 시달리게 했던 담요 아래의 존재는 야쿠자의 돈다발도, 마약도, 죽은 손녀의 미이라도 아닌 두려움에 떨며 잔뜩 웅크리고 있는 또래의 여자 아이였다.

    이제 갓 소년기를 벗어난 츠네오에게 쿠미코는 겁없이 엉덩방아 찧으며 바닥으로 뛰어 내리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그래서 너무 많이 아는 여자 아이일 뿐이다. 덥수룩한 머리 탓인지 그리 예쁘게 보이지도 않고 말투는 퉁명스럽고 직선적인 단지 기막히게 맛있는 요리를 할 줄 아는 신기한 존재. 츠네오가 쿠미코에게 이끌린 이유는 그녀의 불편한 신체 조건에 대한 연민과 여지껏 경험해 보지 못한 신기한 인물에 대한 호기심에 원인을 두고 있다. 츠네오는 아직 깊이 있는 사랑보다는 원만한 대인관계와 자유분방한 이성 관계를 즐길 나이이고, 쿠미코를 만나기 이전에도 그런 생활을 즐겨 왔고 이후에도 그런 생활을 버리지 않는다. 츠네오에게 쿠미코는 일상성이나 보편성이 아닌 일상으로부터 약간은 동떨어진 과외적 성격에 가깝다. 그렇게 선하지도 않고, 어른스럽지도 않고, 투철한 봉사정신을 가진 것도 아닌 츠네오에게 쿠미코는 다름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결핍된 타자에 대한 보편적 연민을 발동시키는 대상일 뿐이다. 이런 인물 설정은 영화를 장애인에 대한 타자화의 오류에 빠뜨린다던지, 사회성이 완전히 결여된 상투적인 교훈만 부각시키는 졸작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감독은 그것을 부정한다던지 아닌척 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더 솔직하게 말하고, 순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들 둘의 만남을 보편적인 연애담으로 보는 것도 무리한 억측은 아니다. 소문으로 부풀려진 정체불명의 유모차를 타고 난데 없이 나타나는 쿠미코나 자신이 해 준 밥을 정말 맛있게 먹어주고 사소한 듯 하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절박한 바람을 이루어 주는 츠네오처럼 사랑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깊어지고, 시간이 흐르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 사랑이 보편적인 연애담과 다른 이유는 필경 처음임이 분명한 연애에 임하는 쿠미코의 자세가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그 끝을 예감했다는 점에서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마틸드와 유사하지만 그 시한부의 관계에 임하는 쿠미코의 자세는 분명 다르다. 마틸드는 사랑의 효력이 다 하기 전에 남편인 앙뜨완과의 완전한 이별을 실행함으로 해서 절정의 순간을 간직하게 하지만 쿠미코는 츠네오로 하여금 원없이 베풀게 하고 모든 배려를 받아 냄으로 해서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는 이별 후의 삶을 준비한다. 언제나 쿠미코를 과도하게 보호하려 하던 할머니나 과격한 성격의 코지의 염려와 달리 쿠미코는 훨씬 강한 존재였던 것이다.

    쿠미코와 츠네오의 사랑을 인어 공주와 왕자님의 사랑으로 해석하게 되면 쿠미코는 조제가 될 수 없고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고 당당해진 쿠미코의 성격은 설명할 수 없다. 쿠미코는 분명 츠네오에게 매달리고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요구하고 거리로 나섬에 추호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쿠미코는 왕자를 만나기 위해 마녀와 거래해서 인간 세상으로 올라 온 인어공주 아리엘이 아니라 츠네오를 만나 가장 야한 섹스를 나누기 위해 칠흙같은 어둠에 싸인 와인 잔을 깨뜨리고 나온 빨간 붕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조제를 동경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조제의 성격을 이식 받은 성숙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망가진 유모차를 수리하려 하지 않고 츠네오의 바람대로 전동 휠체어를 사려고도 하지 않는 쿠미코의 고집은 소설 속의 1년 후처럼 언젠가 기필코 찾아들 이별에 대한 그녀의 대비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들은 쿠미코의 예감처럼 1년과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이별을 한다. 츠네오는 회고한다. 정말 담백한 이별이었다고. 헤어지고 난 후 친구로 남는 사이도 있지만 자신은 평생 쿠미코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의 비겁함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자신이 도망침으로 해서 동거가 끝났음을 고백하는 츠네오의 목소리에는 죄의식이 묻어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쿨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건강하게 들린다. 소란스러운 길 한복판에서 왈칵 눈물을 쏟는 츠네오의 모습도, 그런 츠네오의 곁에서 말없이 지켜보는 카나에(우에노 주리)의 모습도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다. 연적에게 사랑하는 대상을 빼앗기고 그 충격으로 진로까지 포기했던 카나에의 방황이나 그런 카나에의 곁에서 쏟아 낸 츠네오의 눈물은 일종의 성장통 같은 것이 아닐까?

    착한 사람들 일색인 이 영화에서 가장 착하게 여겨 지는 것은 세상을 보는 감독의 눈이다. 감독 이누도 잇신은 영화의 연출면에서 몽환적인 색감이나, 기이한 각도의 슬라이드 쇼를 보여 주면서 신선한 감각을 과시하기도 하고,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 <1년 후>를 연상시킴직한 일러스트를 과감히 삽입하면서 영화 청년의 재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노장들의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무르익은 절제와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시각이다. 현대 일본 사회가 태평양 만큼이나 넓은 세대간의 골로 분열되고, 주의의 개념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들은 동지처럼, 친구처럼 또는, 한국의 소시민도 수긍함직한 이웃처럼 그려진다. 평등과 공존이 가능한 사회. 츠네오를 중심으로 연적의 관계를 형성한 쿠미코와 카나에의 충돌이 잠시 등장하지만 지극히 공정한 공방전을 거쳐 양 쪽 모두가 원하는 바를 성취한다. 츠네오와 담백한 이별을 한 후 쿠미코 또는 조제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질주한다. 그리고,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자신만의 만찬을 위해 생선을 굽는다. 그녀가 망가진 유모차를 수리하지 않은 것은 츠네오가 영원히 자신의 곁에 머물 것이라는 미련한 낙관이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는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로 해석함이 옳겠다..

2005. 02. 13. 山ZIGI VINAPPA 

(총 0명 참여)
부족한 글 공감해주시고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5-06-14 13:04
직접 쓰신건가요?? 진짜 잘 쓰셨네요.. 무한공감..^^*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2005-06-08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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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Josee, the Tiger and the Fish / ジョゼと虎と魚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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