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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아이들을 죽였나 반딧불이의 묘
vinappa 2005-05-08 오후 9:37:35 964   [5]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작품을 보신 분이던지, 아직 보지는 못했고 사전정보만 가지고 계신 분이던지, 아니면 제목조차 처음 들으시는 분이던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작품을 전쟁과 결부시켜 생각하지 마시라는 거다. 한국인에게나 일본인에게나 똑같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2차 대전 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감독은 구태여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전쟁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전쟁 장면이 채 10분도 나오지 않는 올리버 스톤의 <7월 4일 생>이 전쟁 소재의 영화로 분류되는 것은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비극의 결정적 계기가 전쟁이고, 그 이후의 삶들이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자신의 삶을 보상 받기 위한 투쟁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7월 4일 생> 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습과 피란에 할애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공습과 피란을 통한 전쟁의 공포가 아니라, 전쟁 이전부터 종전 이후 까지 꾸준히 이어져 온 그들 내부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서두 자신이 죽은 역의 지하도를 배회하던 세에타의 혼령은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을 보며 "소화 20년 9월 21일에 나는 죽었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소화 20년 8월 14일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선언과 연계 시켜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 원폭으로 인한 패전에 불복하여 내놓은 고발문이라고 단정하게 되면 관객은 이 영화가 고발하고자 한 미성년자 살해의 진범을 검거할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발단인 소화 20년은 대동아전쟁이 종식된 해이자,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해다. 그러나, 그것을 정치적 의미로 확대해석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소화 20년 - 1945년 - 그 해에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이 되고 대부분 끝이 났다는 것의 언급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요 사건이 전개되는 그 시대의 배경이라는 것은 이 작품이 파헤치려는 궁극적인 주제를 한 꺼풀 가려 줄 구실을 제공하기 위한 감독의 배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사적인 것은 일단 이 영화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임을 상기하시고, 화면 속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주목하여 감상하시기 바란다.

    소화 20년의 6월 어느날 항구도시 코베에 사는 세에타는 미군의 공습으로 어머니를 잃고 철부지 동생 세스코의 보호자가 된다. 수습할 수 있는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챙겨서 친척집으로 가지만 그 친척 아주머니의 관심사는 그들이 가져온 값나가는 물건들에 있을 뿐, 이들 남매를 보살펴야 한다는 의무감은 없다. 이들 남매가 가져온 물건들을 판 돈으로 쌀과 찬거리를 장만하면서도, 정작 물건의 주인인 남매는 언제나 찬밥 신세다. 그런 아주머니의 차별이 싫어서 동생을 데리고 방공호에 새살림을 차린 세에타는 처음에는 몇 남은 재산으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 가지만 그마저 다 떨어진 다음에는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진다. 남매의 생활이 점점 궁핍해져 가는 와중에 동네아이들의 텃새로 그들의 보금자리는 쑥대밭이 되고, 동생 세스코는 나날이 시래기처럼 말라 만 간다. 뼈와 거죽만 남은 세스코를 들쳐 업고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내리고, 충분한 영양을 보충하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그 충분한 영양보충이라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절대불가능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세에타이기에 의사에게 뭔가 해결방법을 요구하지만 의사는 그저 의료기술자로서의 역할만 하려 할 뿐 어떤 아량도 베풀지 않는다. 세스코를 살리기 위해 도둑질에 나선 세에타는 텃밭의 주인에게 들켜 흠씬 두들겨 맞고,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동생과 부둥켜 안고 울 뿐 달리 해결방법을 찾지 못한다. 어른들의 삶에 환멸을 느낀 세에타는 양심과 도덕을 버리고, 자신과 동생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공습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빈집을 털게 된다. 공습으로 집과 부모를 잃은 세에타가 살아가는 방식이 공습 때문에 텅 비어 버린 집들을 종횡무진 누비며 옷가지와 먹을 거리를 훔치는 것이라니 역설적이지 않은가. 이는 또한, 막부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체 일본 국민들의 전쟁 불감증을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 불감증, 그것이 바로 섬나라 민족들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인 것이다. 어느새 잠잠해진 공습 때문에 세에타는 빈집 털이를 중단하게 된다. 이 고요와 평화가 천황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한 일본의 패망 때문임을 세에타는 모르고 있는 상태. 세스코는 이 위장된 평화 속에서 오빠가 차려 주는 마지막 만찬도 받지 못하고 그렇게 굶어 죽고 만다. 그리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에타도 죽는다. 소화 20년 9월 21일의 일이었다.

    일본의 아니메계가 배출한 그리 흔치 않은 사실주의 작가 다카하타 이사오는 전쟁이 배경인 이 작품에서 전쟁 자체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는다. 미군의 공습과 어머니의 죽음, 사라져 버린 삶의 터전이 영화의 시작이지만 그것은 그들 남매가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떠나야 하는 힘겨운 독립의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만일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전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좀 더 성숙한 화자를 데려오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제 14세인 세에타의 전쟁에 대한 증언은 사실성 내지는, 공정성 있는 통찰을 담아 내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은 자국 국민들의 비정함, 타인에 대한 무관심, 철저한 개인주의다. 감독은 이에 대해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를 자신은 과거 일본 정부가 국제 사회를 전체주의로 퇴행시키려 한 범죄 집단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글자도 깨치지 못한 세스코와 세스코의 나약한 보호자 세에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전쟁도 굶주림도 아니었다. 그들 남매를 죽게 만든 것은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않는 보편적 일본인들의 무관심과 개인주의였다. 만일 의술을 인술로 생각하는 의사라면 영양실조 걸린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을 섭취시키라는 말 대신 영양제 한 대라도 공짜 처방해주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리 하지 않았다. 의료기술자로서의 직업상의 업무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아이들을 착취하는 친척 아주머니, 굶어서 죽어 가는 동생을 위해 도둑질한 어린 오빠를 짐승처럼 두들겨 패는 이웃 주민들. 이들은 모두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숏컷>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그들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베풀지 않는 비정한 현실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좋은 인물들이 또 어디에 있을까?

    영화 속 사건들을 전쟁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결론 짓기에는 영화의 마지막에 그들 남매의 혼령이 내려다 보는 화려한 코베의 야경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릇 한 시대를 뛰어 넘었음 직한 현대적 건물들이 늘어선 코베의 야경, 그 야경을 내려다 보는 소화 20년에 죽어 간 아이들. 이들 아이들의 존재는 구 시대의 망령이라기보다는 전쟁과 분리된 현 시점에도 엄연히 그런 비정함과 무책임에 희생당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장치로 해석함이 옳다. 그렇다면 왜 전쟁이 배경인가? 그것도 일본의 근대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들의 후손들에게 은폐하고자 했던 그 흉악한 만행의 결과인가? 서두에서 분명하게 기술했었다. 면죄부 또는,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할만 한 구실이 필요했다고. 언제 공습에 죽을지 모르는 전쟁 통이라서, 집이고 뭐고 죄다 불타 버리고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서, 그래서 남을 돌아 볼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는 면죄의 장막이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당 시대 일본인들이 경험한 가장 최근의 전쟁이 바로 2차 대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감독은 이 모든 잔혹사를 전쟁이라는 얄팍한 장막으로 덮어 버렸을까? 그렇다면, 친척 아주머니의 자식들의 밥상이나, 화려하게 차려 입은 여인네들, 그리고 애써 죽은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현대 코베의 화려한 야경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을까? 감독의 입장은 단호하다. 일본의 패망과 아이들의 죽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전쟁을 빌미로 해서 자신들의 개인주의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는 희생자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퍼렇게 날이 선 독설을 퍼붓는다. 그것이 이 아이스럽지 못한 만화영화가 보여 주려 했던 진실이다.

    감독은 좀 더 나아가 일본 사회의 뿌리깊은 병폐까지도 보여 준다. 세스코가 죽고 난 후 굶주림에 지쳐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는 세에타의 옆으로 화려하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스쳐 지나 어느 집으로 들어가고, 그녀들이 들어간 2층 집에선 <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동족의 아픔과는 상관없이 그들은 화목한 가정 안에서 꿀 같은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양분된 사회, 하나의 영토 안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지하도에 죽어 널 부러진 세에타를 보면서 역무원들은 일말의 동정도 던지지 않는다. 그들에겐 그저, 시체 하나가 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에타의 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 귀찮아 한다. 귀찮아하면서 덧 붙이기를 굶어 죽은 시체들이 널부러진 지하도는 새로운 정복자들을 맞이하기에 미관상 좋지 않다고 말한다.

    동정이 사라진 세상, 온정을 폐기처분한 사회, 전쟁보다 잔혹한 그들 내부의 분열. 세에타와 세츠코를 죽인 진범은 전쟁이 아니라 전쟁의 아비규환을 틈타 일본 열도를 집어 삼킨 이기적이고, 비정한 어른들이었다.

 

2004. 03. 28. 山ZIGI VIN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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