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감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다.(허나 존경하진 않는다.) JSA와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것을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한국영화 10편 중에 한편으로 꼽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신작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안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이 작품이 "박찬욱감독이만든 로맨틱코미디"라는 점이었다. 박찬욱감독이 쉬어가는 느낌으로 영화를 찍었다고 말했는데 그 쉬어가는 장르의 영화가 하필 로맨틱코미디라니......
박찬욱감독은 로맨스를 잘 다룰 줄 모른다.(물론 올드보이에서의 미도와 대수의 사랑이 있지만 그걸 로맨스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이는 같은 세대의 감독들인 봉준호 김지운 장준환 최동훈감독들도 마찬가지이다.(단, 허준호감독은 빼고) 하지만, 이 세대의 감독들은 아직 진짜 사랑얘기를 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찬욱감독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다. 그것도 이전 영화에서 힘을 너무 많이 준 상태에서 말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시간을 왔다갔다하는 편집과 헨드헬드, 그리고 뛰어난 미장센의 미술과 조영욱의 음악등 박찬욱감독 특유의 영상미를 이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사실상 로맨스영화라고 하기 힘들다. 로맨스 영화란 두 사람의 사랑이 잘 묻어나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애절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립하거나 잘 이어주는 무언가도 빠진듯한 느낌이다. 이건 복수시리즈에서 보여주었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제대로된 사랑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난 정말 박찬욱감독이 이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해서 찍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이는 금자씨에선 못 느꼈던 감정이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감독의 애정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감독이 정말로 찍고 싶어서 찍은 것이었다. 물론 관객을 먼저 생각하고 흥행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영화감독이지만, 박찬욱감독은 이미 그 수준을 넘었다. 이는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잘 나타났다. 박찬욱감독은 영화가 완전 쪽박이 나도 다음 영화를 맘편히 찍을 수 있는 수준까지 왔기 때문이다. (이미, 박찬욱감독은 차기작인 흡혈귀영화 "박쥐"를 준비중에 있다.) 이 영화가 네이버에서 평점 5점대를 받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물론 이전 박찬욱감독 영화보다 훨씬 밝고 웃긴 장면이 많기 때문에 힘을 덜 들이고 볼 순 있지만 결코 이전에 보여주었던 영화보다 쉬운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렵다.
복수 삼부작은 그 끝이 명확하다. 그리고 기본적인 권선징악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서로를 복수하기 위해 스크린 속을 활보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끝이 명확하지도 않으며 주인공과 주변 인물도 도무지 그 정체를 알수 없는 정신병자들이며 기본적인 스토리도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여자와 안티소셜을 가지고 있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니 이 얼마나 어려운 스토리인가.(대책이 서지 않는 말이 맞는 거 같다.) 박찬욱감독은 전작에서 거의 모든 장면에 의미를 부여하고 복선을 깔아놓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특별한 복선이나 반전도 없다. 그냥 단편적으로 이야기가 흘러 갈 뿐이다. 이런 면에서 어찌보면 이 영화는 복수삼부작보다 더 쉬운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분명 이전 작품보다 어렵다. 그것은 바로 박찬욱감독이 자신의 전공인 "철학"을 이 영화에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싸이보그가 하지 말아야 할 일(?) 7가지가 나온다. 동정심,망설임, 슬픔에 잠기는 것, 설레임, 쓸데없는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영군은 이 여섯가지를 일순에게 넘겨주면서 점점 싸이보그화 되어간다. 동정심과 망설임. 슬픔, 설레임,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 모두 인간이 지녀야 할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모두 없애면 과연 정말 싸이보그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일순과 영군의 사랑때문이다. 일순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의 재능을 빼앗는 능력"(?)을 가지고 영군을 기쁘게 할 때마다 영군은 망설임과 슬픔과 설레임등을 느낀다. 그러나, 영군은 그것을 일순에게 넘겨주면서 인간의 감정이 사라지고 잔인하고 전투적인 감정이 마음속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의 후반부에 서로의 사랑으로 치료되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두 사람이 사랑하고 또 이별하는 과정을 그려냈다기 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면서 점점 자신의 본질과 가장 소중히 해야 할 것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가장 칭찬하고 싶은 측면은 바로 임수정의 연기이다. 장화홍련에서 이미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던 임수정이었지만, 이 영화에선 그녀의 커리어사상 최고의 연기를 펼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눈썹도 밀어버리고 틀니까지 쓰면서 망가지는 연기를 했지만, 여전히 사랑스럽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찾아 내어 자유자제의 표정과 몸짓연기를 구사하는 연기는 가히 최고였다.
그 밖에,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델리카트슨의 사람들과 같은 방식의 오프닝부터 시작해서(개인적으로 한국영화 최고의 오프닝이 아닐까 생각한다.) HD로 촬영된 정정훈 감독의 촬영은 역시 최고였으며, 그 밖에 살인의추억에서의 경찰서, 올드보이에서의 감금방, 달콤한 인생에서의 라운지, 괴물에서의 하수구등과 같은 뛰어난 공간을 창출해낸 류성희 프러덕션 디자인 감독의 실력도 여전했다. 또한, 박찬욱패밀리인 의상에 조상경, 음악에 조영욱도 모두 뛰어났다.(박찬욱감독도 스필버그감독처럼 "패거리"들로만 구성되어 영화를 찍고 있다.)
이 영화는 매우 어렵다. 그리고, 여타 로맨틱코미디 처럼 유쾌하지도 않다. 이 영화는 매우 특이하다. 충무로에서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특이한 영화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언제까지 코미디와 멜로, 드라마만 고집할 것인가. 괴물과 같은 SF영화도 필요하고, 타짜와 같은 도박영화도 필요하다. 즉, 여러 장르영화가 많이 나와야 우리나라 영화계에 발전이 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분명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진 못할 영화다. 그러나 분명 먼 후일이 되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작품이 이 시대에 개봉된 것을 다행으로 여길 날이 올 것이다.
20자평 - 천재적역량으로 만든 초보적감성의 영화! 그래도 잘만들었다!
유의사항 - 두 주인공이 정신병자(?)랍니다.
이 장면만은 - 한국영화사상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오프닝. 오달수씨가 나오는 모든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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