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오가와 요코 원작의 동명소설 <약지의 표본>을
프랑스 영화감독이 디안느 베트랑이 영화화한 이 영화는 장자의 '호접지몽'
에피소드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듯 몽환적이면서도 비유와 은유적인 표현 가득한
영상을 접할수 있다. 이리스(올가 쿠리렌코)는 21살의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레모네이드 음료 공장에서 일하던 중, 약지를 베여 약지의 살점과 함께 고통스런
삶의 단편을 남긴 음료 공장을 떠나온다. 별 감흥없이 보던 도입부분의 이리스의
모습이 보여주는 결말로의 승화를 엿본다면 결코 아무런 감흥없이 지나쳐 볼 부분
이 아니다. 레모네이드 공장이라는 틀의 세계에서 살아온 이리스가 자신에게
고통과 아픔의 기억을 선사한 이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공간으로의 여행을
결심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운명의 이끌림처럼 일할 곳을 찾아다니는 그녀를
낯선 숲 속의 표본실로 발걸음을 인도한다. 호러 영화의 유적지라도 되는 기묘한
분위기의 표본실에서 만난 표본실 원장(마크 바르베)은 구인자리 광고를 확인한
그녀에게 친절하게 넉넉한 보수와 함께 그곳에서 일하도록 자연스럽게
이끈다. 운명처럼 표본을 만드는 일의 보조로서 사무업무만 처리하며 표본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리스의 삶은 그녀가 머무는 여관에서 같은
공간을 경유하는 선원과의 삶을 공유하는 공간과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관에서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지만 시간대상 결코 같은 시간대에 서로의
공간을 경유할수 없는 이곳은 모든 것의 불일치성을 강조한다. 사랑, 기억,
삶의 모든 경계가 어긋나 있는 이곳은 이리스가 표본실에서 생활할때와는
정반대의 불안정한 공간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표본실은 그녀가 원하는
이상적인 편안함의 공간이 되어간다. 원장이 선물한 자신의 말에 딱 맞는
구두가 그것을 대표적으로 상징해 준다. 보지 않고 신데렐라의 구두인양
신기 편안한 구두와의 완벽한 일치는 그녀의 삶이 구두에 의해 귀속됨과
동시에 그 안에서 삶의 자유를 누리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원장이 제시한
사슬같은 구속이 오히려 그녀에게 자유가 되고, 표본을 만들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선원이 떠나면서
제시한 만남이 결코 성사되지 못하고 흐트러진것 처럼 불규칙한 삶의 패턴을
제시하던 여관방의 삶을 뒤로한채 자신에게 고통이 되고 그리움의 마음조차
봉인하고자 하는 기억의 단편에서 표본실 원장이 자신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라며 약지의 표본을 결심하는 이리스의 삶의 과정은 영화의 결말로 치닫게
만든다. 일반영화와는 다른 관점에서 보여지는 것이 이리스의 주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철저하게 고립된듯 보여지던 그녀의 친,인척 관계에
대해 영화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즉, 그녀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 보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해방구에 욕망이라는 해방구의 열쇠를 스스로 쥐게 만들어
영원함을 무기로 한 자신을 희생하는 표본으로서의 선택은 이 영화의 결말로
이어진다. 결코 벗어날수 없는 굴레가 되어 시종일관 몽환적이고 현실적인
경계와 거리가 먼 전개를 보여주는 영화는 다양한 감상을 남긴다. 삶, 사랑,
기억과 경계에 대한 신선한 자기성찰로 자아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
그것이 약지의 표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