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차태현)는 어리숙하고 순진한 고등학생이다. 같은 반의 수은(송혜교)은 공부 잘하고 얼굴 예쁘고 성격 밝은 교내 퀸카. “나 크로켓 하나만 사줘.” 어느 날 수은은 대뜸 수호에게 다가오고, 둘은 손 한번 잡지 못하면서도 귀엽게 사랑을 키워간다. 안타깝게도 이 사랑의 끝은 예정돼 있다. 이 사실은 스포일러가 아니다. 영화 <파랑주의보>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수호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동창모임 중 “오늘이 수은이 죽은 날이잖아”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0년 뒤 현재에서 과거를 추억해 들어가는 영화 <파랑주의보>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기억’으로서의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첫사랑은 죽음도 떼놓을 수 없다. 장의사인 수호네 할아버지의 첫사랑 이야기가 영화의 믿음을 뒷받침한다.
<파랑주의보>는 가타야마 교이치의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영화화 판권을 사서 만들어졌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 멜로영화는 지난해 5월 일본에서 개봉 10일 만에 700만 관객을 끌어모으기도 했다. <파랑주의보>는 영화든 소설이든 원작을 먼저 접한 사람들에게 크게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선 소녀의 죽음과 음성메시지를 통한 교감 등 크고 작은 설정들이 같다. 한여름 바닷가의 해사한 자연 풍경, 새하얀 교복, “네가 세상에 태어난 뒤로 단 1초도 내가 이 세상에 없었던 적이 없어”와 같은 절절한 대사들이 수놓는 첫사랑의 분위기도 유사하다.
첫사랑은 잊을 수도 없고 더럽혀질 수 없는 순수한 것이라는 믿음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므로, <파랑주의보>가 말하는 사랑론을 무조건 우습다거나 억지라고 할 수는 없다. 이상한 것은 ‘순수한’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영화는 종종 촌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뽀사시한 화면과 낯 간지러운 대사들은 필요하다 쳐도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하는 감초 유머들, 두 연인의 교감을 잡아내는 숏들의 평면적인 구도 등은 얼마든지 고민해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이다. 순수함=촌스러움=낡음의 공식을 그나마 흔들어주는 것은 차태현의 연기다. 어떤 대목에서 차태현의 대사 처리와 동작은 뻔한 인물과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고 설득력있게 한다. 수은 역의 송혜교도 영화 데뷔작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한다. 그러나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어떤 한계에 갇힌다. 그것은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닮아선지, 낡은 관습을 의심하지 않는 연출의 빈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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