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 Sophie Scholl-the final days / Sophie Scholl-die letzten 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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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사 : 스폰지 /
자유의 목소리를 들어라! 히틀러를 타도하려는 독일 젊은이들의 두려움 없는 움직임
“우리는 조국을 사랑했으나, 왜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 잉에 숄
백장미단를 비롯한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에 반대했던 젊은이들 중 몇몇은 한 때 히틀러 유겐트(독일 나치스의 청소년조직)의 단원이었다. 독일을 최강국으로 만들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순수하게만 받아들였던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분별한 학살까지도 감행했던 정부에 정신적인 상처를 받고, 결국 게슈타포의 감시를 피해 비밀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다. 소피와 한스 숄 남매 역시 어린 시절을 히틀러 유겐트에 바쳤다. 특히 백장미단의 주 멤버였던 한스는 히틀러 유겐트의 열혈 단원이었지만 히틀러가 약속한 미래가 더이상 독일이 진정으로 꿈꾸던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나치에 의해 자행되던 압제와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이들 젊은이들은 용기로 무장하고 독일인의 남은 양심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 앞장섰다.
이렇듯 독일의 몇몇 젊은이들은 곳곳에 자유를 외치는 전단을 뿌리고 길거리에 ‘히틀러 타도’를 쓰는 등 지하조직 활동을 해나갔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조직이 바로 뮌헨 대학의 백장미단이었던 것. 백장미단은 위험을 무릎 쓰고 복사기와 타자기 그리고 우표 등을 몰래 구해 전화번호부를 보면서 자신들이 만든 전단을 뮌헨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 널리 퍼뜨리려 했다. 1943년 소피 숄을 비롯한 세 명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계기가 된 전단은 후에 남은 멤버들에 의해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역에 뿌려졌다. 이러한 백장미단의 투쟁 활동은 소피 숄과 한스 숄의 누이인 잉에 숄에 의해 수기로 남겨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군사독재 시절을 겪은 과거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나치 지배 아래 압제에 항거해 진정한 자유를 위한 용기 있는 외침을 감행했던 바로 그 백장미단, 그리고 그 단체에서 유일한 여성이었으며 가장 어렸고, 또한 첫 희생자였던 소피 숄의 눈부셨던 마지막 날들을 그리고 있다.
소피 숄, 그녀가 5일 동안 찾아낸 진정한 ‘자유’에로의 여행
“우리는 길을 포장하도록 허락 받았지만, 그 전에 그것을 위해 죽어야만 한다.” - 소피 숄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백장미단의 첫 희생자들, 특히 소피 숄이라는 유일한 여성 멤버가 그녀의 의지와 소신을 지켜나가는 과정을 그려 나간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소피 숄의 심리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심문에 이어 재판, 그리고 집행에 이르는 5일간의 에피소드를 철저히 소피 숄의 태도를 관찰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어릴 때부터 자유롭게 자란 소피 숄은 항상 정의의 편에 서있을 것을 가르친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히틀러 유겐트 단원 활동에서부터 백장미단, 그리고 죽음에 있어서까지도 그녀는 철저히 자기의 소신을 지켜나갔다. 소피 숄은 학문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예술에도 재능을 보여 ‘퇴폐 미술가’들의 모임에서 미술 활동을 했다. 또한 철학과 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히틀러 유겐트에서 벗어난 후, 그녀에게 대안적인 세계를 제공해 주었다. 소피가 뮌헨 대학에서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 그녀를 정치적 활동에 연루시키지 않으려는 오빠 한스 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백장미단에 가담하게 된다. 정치활동뿐 아니라 예술과 자연을 즐기던 백장미단은 대학 초년생인 소피 숄에게 이상적인 본보기였던 것이다. 소피 숄은 1942년 여름, 처음으로 백장미단의 전단을 제작하고 돌리는 일에 참여한다. 1943년 2월 18일 그녀는 여섯번째 전단을 학교에 몰래 돌리다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소피 숄의 죄를 자백받기 위해 시작된 며칠간의 지리멸렬한 심문과정. 심문관 모어와 소피 숄은 서로 한 치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소피 숄은 그녀와 오빠, 그리고 백장미단의 자유를 위해 거짓 증언과 합리화를 시도하지만 모어의 치밀한 추궁 끝에 결국 자신을 희생하고 자기가 믿는 정의만을 말할 것을 결심한다. 목숨을 내건 모어와의 심문 과정은 소피 숄을 자기자신만의 자유가 아닌 정의를 위해 떳떳하게 싸우도록 만들었고, 이 과정을 통해 그녀는 ‘진정한 자유’라는 이상에 근접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모어는 소피 숄의 그러한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쓰지만 그것마저도 그녀는 거부한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가득차 있을 스물 한 살의 젊은이에게는 너무도 힘든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정의를 통한 진정한 자유를 깨닫게 된다. 사형집행 전날, 소피 숄은 세례를 받으려는 아기를 안고 가던 중 낭떠러지의 갈라지고 있던 틈으로 자신은 떨어지고 아기는 구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녀에게 자신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소피 숄은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을 향해 미소 지으며 여유 있게 사형장으로 걸어간다. 실제로도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영화보다 더욱 극적인 역사적 사실은 소피 숄의 찬란했던 죽음이 그 어떤 죽음보다 고결했음을 말해준다.
실제 상황에 충실한, 가공되지 않은 사실의 재현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의 대부분은 소피 숄과 심문관 모어와의 조사 과정으로 구성되었다. 어둡고 칙칙한 모어의 사무실과 감옥, 그리고 재판장에서 우리는 영화가 최대한 사실에 충실하려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마크 로드문트 감독은 대사 하나까지 새롭게 찾아낸 심문 기록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실존 인물과 상황들을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특히나 1990년 동독의 문서국에 숨겨져 있던 미출판 자료를 통해 게슈타포 심문관 모어와 소피 숄의 사실적이고도 흥미진진한 대치 상황을 영화 속에 그려낼 수 있었다. 영화 세트 또한 최대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들에서 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려고 했으며, 촬영에 있어서도 특수효과를 배제한, 가공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러난다. 3년의 영화제작 기간 동안 정보수집으로만 2년을 보냈다는 마크 로드문트 감독의 집념이 이 영화의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마크 로드문트 감독은 소피와 모어 사이의 감정을 갈등과 대립, 심지어 그들의 교감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감독은 “각본은 인물의 내면 세계에 매우 커다란 비중을 싣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의 감정과 행동, 갈등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소피 숄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주인공이 죽을 때까지의 ‘감정적인 여행’에 주목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인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2005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당당히 은곰상의 영예를 얻음과 동시에 많은 영화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더불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게 소피 숄로 다시 태어났던 줄리아 옌치도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영화의 완성에 큰 공헌을 했다. 명감독과 명배우의 노력으로 탄생된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유럽을 울린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200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까지 오르며 그 감동의 순간을 널리 알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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