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오스카의 승자
금년도 아카데미상의 승자였던 <슬럼독 밀리어네어>(이하 <슬럼독...>)는 금년도 작품상 부분의 경쟁자였던 데이비드 핀쳐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와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핀쳐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 벤자민 버튼의 삶을 통해 ‘죽음’과 ‘삶’의 회한을 아름다운 미장센 위에 그려냈다면 <슬럼독...>는 영화의 어떤 요소보다도 ‘드라마’로서의 힘이 강한 영화다. <슬럼독...>의 캐릭터들은 <벤자민...>의 미묘한 심리를 담고 있는 캐릭터들의 힘에 미치지 못한다. 감독 데이비드 핀쳐가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면서도 전체적인 영화적 분위기를 차분하게 이끌고 나간 <벤자민...>과 달리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미지와 이미지가 맞붙어 충돌하는 강렬함 스타일이 돋보이는 영화다. 또 <벤자민...>의 세계가 상식적이지 않은 설정을 지니고 있음에도 ‘죽음’이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주제에 천착하는 것에 비해 <슬럼독...>은 분명히 현실에서 출발하기는 하지만, 영화가 점차 진행되면서 비현실적인 고전 영화의 세계관에 근접해 간다.
만약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이야기를 현대의 뉴욕 또는 런던에서 촬영했다면, 이 영화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극단적인 빈곤을 치환하기 위해 성립된 ‘발리우드’ 영화의 비현실적인 뮤지컬 시퀀스만큼이나 인도의 거대 도시 ‘뭄바이’가 뿜어내는 풍경들은 극단적이다. 10여년의 시간동안 빽빽하게 들어섰던 거대한 판자촌 자리에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솟아있는 마천루가 들어서고 이 도시의 극단적인 풍경의 변화만큼이나, 우리들의 주인공들의 삶은 극단적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그들(서구인)이 보기에 ‘뭄바이’라는 배경은 다소 비약적이라고 느껴질 만큼의 숨 가쁜 드라마의 배경으로 너무나도 적합해 보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인도 출신의 스탭들이 결합한 이 글로벌 프로젝트는 일단 강렬하다. 세 명의 남녀, 구체적으로는 두 형제와 우연히 만난 소녀는 이슬람-힌두교 간의 분쟁 와중에서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가 된다. 부모의 생존시에도 화장실에서 잔돈푼을 받으며 팍팍한 삶을 영위했던 이들은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더욱 거친 세계에 진입하고 운명은 가혹하기만 하다.
운명의 퀴즈쇼
이 영화의 주인공인 자말(데브 파텔)은 운명과 사랑의 힘을 믿는 보기 드문 ‘고전적인 로맨티스트’다. 그는 헤어지고 또 헤어져도 어릴 적부터 연정(戀情)을 품었던 라티카(프리다 핀토)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다. 아니, 만나지 못할수록 라티카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져만 간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떠났던 1200만이 살고 있는 뭄바이의 골목을 뒤지며 헤어진 라티카의 흔적을 뒤쫓기 위해 무던한 애를 쓴다. 반면 이 영화에서 여인 라티카는 폭력적인 지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현대 영화로서는 드물게 라티카는 순응적인 여성성을 고수한다. 사랑을 위해 언제든 자신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는 고전적인 로맨스의 연인으로서 매우 적합한 인물이며, 그녀에게 삶의 의미는 자말과의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말의 형이자 문제적 인물인 살림(마드허 미탈)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그는 기꺼이 자신이 접하는 ‘폭력의 고리’를 받아들여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이다. ‘죽지 않기 위해 죽인다’는 킬러의 규율에 충실한 그는 한편으로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응하는 반항아이지만, 그 역시 폭력으로 군림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2시간에 걸쳐 이들의 드라마틱한 삶을 폭풍처럼 그려낸다. 삶 자체가 폭력에 포위되어 있는 삶. 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이 영화는 그렇게 엉켜버린 이 청춘 남녀의 삶을 쉴새없이 보여진다. 이들은 때론 서로를 증오하고 때론 서로를 오해하며 때론 도저히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벌인다. 한발 짝 떨어져 생각해 보면 <슬럼독...>의 이야기는 너무나 극적이기 때문에, 때론 작위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령 점점 더 구원의 손길에서 멀어진 세계로 침잠해 가는 라티카의 삶의 궤적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의 구성은 흥미를 자극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소년 자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적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유명한 ‘퀴즈쇼’에 출연한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이 한 마디로 귀결된다. 자말은 왜 퀴즈쇼에 출연했는가? 치밀한 영화의 내러티브는 그 궁금증을 기폭제로 차근차근 자말의 인생 역정을 뒤쫓고 결말부에 가서야 그 해답을 내놓는다. 관객 스스로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거칠고 드라마틱한 자말의 삶 자체를 반추해야 함은 물론이다. 정규 교육 한 번 받지 않았으면서도 어려운 퀴즈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자말. 이 영화의 퀴즈 쇼는 표면상 ‘지식’을 묻는 쇼이지만, 자말에게는 자신의 삶 18년을 관통하는 ‘키워드’에 대한 퀴즈인 것이다. 영화는 흥미진진한 이 청년의 삶을 급변하는 뭄바이의 이미지와 결합시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친숙하면서도 생경하며 그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차별성을 부여함은 물론이다.
그들의 얼굴, 우리들의 얼굴
개인적으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미학적으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그것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란하고 이국적인 영상과 격렬한 드라마로 가득 채워진 이 영화 나름의 매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슬럼독...>의 주인공 자말, 라티카, 살람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생을 3,4배 빠르게 돌려놓은 것 같은 삶을 산다. 하지만 사실 이들과 같은 삶은 오직 뭄바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린 고난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아가는 자말, 라티카, 살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서울의 철수들과 영희들의 얼굴들을 이미 알고 있다.
모택동은 ‘권력은 총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그 경구를 ‘권력은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바꾼지 오래이며,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누군가들의 모습들은 대개 자말들처럼 시궁창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자말에게 찾아온 거짓말 같은 행운은 어쩌면 그들의 가혹한 운명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보상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록 그것이 꿈일지라도...어차피 영화란, ‘꿈’의 기술적 재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겠는가?
about DVD
개인적으로 최근 블루레이 타이틀을 수집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영화의 한국판 블루레이 타이틀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쉽다. 장면과 장면이 충돌하는 몽타쥬를 선호하는 대니 보일 감독의 스타일은 이 영화에서도 여전한데, 어떤 장면에서는 거친 필름 입자가 드러나는 장면들도 있지만, 이는 생생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감독의 의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에 출시된 DVD의 영상 퀄리티는 그런 점을 감안하면 매우 우수한 편으로, 영화의 현란한 이미지들과 색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편이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역시 생생하다. 복잡한 뭄바이의 풍경의 소음과 효과음들이 서라운드 스피커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서플먼트로는 음성 해설이 일단 2개라는 것이 눈에 띈다. 감독 대니 보일과 배우 데브 파텔의 음성 해설, 프로듀서 크리스찬 콜슨과 작가 사이먼 뷰포이가 각각 짝을 이루어 음성 해설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여분 분량의 메이킹 필름과 삭제 장면 그리고 극장용 예고편이 수록되어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
출시일 : 2009-08-05
출시사 : 버즈픽쳐스
Starring : 데브 파텔(자말 말리끄) / 프리다 핀토(라띠까) / 마두르 미탈(살림) / 아닐 카풀(프렘 쿠마) / 우데이 초프라
Director : 대니 보일
Running Time : 120 Min
Video Format : 2.3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
Audio Track : 영어, 힌디어 / 돌비디지털 5.1
지역코드 : 3
관람등급 : 15세 이용가
디스크수 : 1 disc
자막 : 한국어, 영어
스페셜 피쳐 : Commentary By Director Danny Boyle And Actor Dev Patel / Commentary By Producer Christian Colson And Writer Simon Beaufoy / Slumdog Dreams : The Making Of Slumdog Millionaire / SLUmdog Cutdown / Trai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