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원짜리가 백장만 넘어도 돈 계산이 잘 안 되는 둔한 머리로 12월 달에 개봉을 선포한 <태풍>, <야수>, <청연> 세 편의 제작비(마켓팅 예상 비용)를 얼추 계산해보니 도합 ‘400억'에 육박한다. 액수의 크기와 실제 저 정도의 돈이 실존하는지 조차도 가늠이 안서는 무시무시한 금액임에는 분명하다. 덩치가 커질수록 비주얼과 액션은 거대해진다. 모든 이들이 이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세 영화를 12월 ‘한국영화 빅3’라 추켜세우면서도 암암리에는 각자의 라이벌로 서로를 부추긴다. 그들 모두 영화가 보여줄 스펙터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연말 승자가 누구인지를 도박꾼의 허풍마냥 떠들고 있는 이 때, 타고난 반항기로 인해 의구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언제부터 한국영화가 연말 성수기를 노려, 한 작품이 아닌 ‘다수’의 거대영화가 난립하며 스스로 ‘강자’임을 자청했을까?
관객천만시대를 연 이후, 한국영화 시장의 크기는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다. 사실 성장은커녕 천만시대의 거품을 빼내는 과정에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크린 너비를 압도하고 싶은 영화적 열망은 2005년 제작비 100억을 훌쩍 뛰어넘은 3명의 자식을 출산했다. 덩치와 파워를 앞세워 지난해 최강자로 홀연히 나타난 <역도산>에 비하면 올 2005년은 ‘다산’의 진통을 겪고 있다. 사실 <태풍>, <야수>, <청연>은 막대한 제작비 투자, 두 글자의 제목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작품들이다. 무대의 배경이 되는 시대와 공간뿐만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목적성도 다르다. 그런데 동시대에 도착한다(12월15일 개봉예정)는 이유만으로 세 작품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필연적 업보를 잉태하며 승자의 우위를 선점하려는 물밑 작업이 지금도 치열하다.
그래도 세 영화의 비슷한 점을 꼽는다면 스케일을 시각화하는 과정의 정점에 ‘남성’을 위치시킨 것뿐이다. 물론 <청연>은 여성 ‘박경원’(장진영)의 삶을 쫓아가는 감동드라마에 가깝지만 일제점령기라는 시대적 특수성과 맞물린 ‘지혁’(김주혁)과의 ‘멜로’는 영화의 또 다른 한축을 담당하는 구심점 역할이다. 이데올로기와 스케일이 만났을 때,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대부분 젊은 남성의 육체(소년성)에 시대의 그림자를 문신하며 스펙터클로 치닫는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한국영화 빅3’로 일컬어지는 <태풍>, <야수>, <청연>이, 숙명적 ‘대결’을 피할 수 없다면 각각의 영화가 목적하는 바를 상징하는 젊은 남성의 육체가 시각적 쾌감의 원천이 돼야한다. 크기와 이데올로기, 시대를 무시하고 오로지 주인공 ‘남성’이 뿜어내는 육체성이야말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근시안적 모범답안에 가깝다. 장동건, 이정재, 권상우, 유지태, 김주혁의 뿜어내는 절제된 남성미와 고혹적인 육체 라인은 관객의 눈을 현혹하며 티켓파워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
누구에게 매료될 것인가? 는 세 영화중에 어떤 영화를 ‘선택/관람’ 할 것인가의 다름 아니다. 각자 타당성 있는 조건으로 ‘꽃미남’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육체의 소유자들이 집결하는 12월 한국 대작영화들! 우린 시대적 소년성을 상징하는 이 ‘남자’에게 제대로 꽂혔다.
▶ 국가가 잉태한 사생아, ‘장동건’
시선의 중심이 되는 미간은 너무 반듯하다 못해 미모의 권좌에 오른 황제의 고집이 보이며, 초짜시절의 별명인 송아지 눈은 이제 독기와 아집으로 그득한 절대 권력의 옥쇄가 된지 이미 오래다.
무형의 존재, 국가가 자신을 버리고 누이를 창부로 만들자 그는 국가를 죽이기 위해 ‘해적’이 되어 돌아왔고 그의 증오와 분노는 땅을 절단하는 거대한 칼이 되어 실존적 존폐의 원흉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다.
체중감량을 비롯하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 이상 강렬할 수 없음을 몸소 실천하며 <태풍>에서 장동건이 만들어 낸 해적 ‘씬’은, 한국영화사상 유례없는 캐릭터의 스펙터클을 선사할 예정이다.
▶ 국가가 선택한 보디가드, ‘이정재’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 된 그의 육체미는 남자후배들이 CF, 드라마에서 과감히 몸을 드러낼 때마다 흐릿해졌고 스크린에서 그는 뚜렷한 흔적을 못 남기며 부유했다. 사실, 이정재의 매력은 섬세하게 이어진 바디라인이 ‘강함’을 숨긴 데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가는 눈과 물결치듯 흐르는 턱 선에서 소재의 폭이 넓은 배우로서의 장점이 부각된다.
<태풍>에서 파괴하는 자, ‘씬’에 맞서 지키는 자의 비장미를 품고 있는 ‘강세종’(이정재)은 이정재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그것 즉, 흔들림 없는 순정에서 나오는 ‘강함’을 드라마틱한 어법으로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화려하게 스크린에 펼칠 예정이다.
<모래시계>의 ‘재희’가 부활했다고 단언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 폭력과 저항의 새로운 아이콘, '권상우'
투명한 피부는 폭력의 역사를 여과 없이 투과하는 창이 돼, 권상우를 아름다운 ‘패배자’로 스크린에 박제하는가 싶었다. 시대가 억압하고 구타를 가해 키운 소년은 현대 도시에 흘러들어와 자신의 몸에 낙인찍힌 폭력의 역사를 스스로 재현한다.
<야수>에서 ‘권상우’는 더 이상 울부짖는 소년이 아니다.
그는 머리로 생각하기에 앞서 가슴이 먼저 ‘반응’하고 본능적으로 ‘분노’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한 마리 야수가 되어 또 다른 폭력을 갈망할 뿐이다.
소년의 성장은 비열함과 퇴폐가 공존하는 도시 안에서 또 다시 잠시 머뭇거릴 것이다.
▶ 드디어 폭력의 길에 들어선 소년, '유지태'
호리호리한 키는 신체적 성장을 상징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듯한, 허탈하고도 희미한 미소는 느리게 이어지는 나직한 음성 사이에서 그가 끝내 (자의적으로) 성장을 포기했음을 전해준다. 네버랜드에 홀로 남은 군주 피터팬처럼 말이다. 1인극 역할놀이에 싫증난 듯, 유지태는 거친 숨소리를 내뿜는 형사 장도영(권상우)을 동지 삼아 새로운 놀이에 빠져들었다. 타인의 붉은 혈이 자신의 소맷자락에 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던 오만한 네버랜드의 군주는 간신히 억제시켜 왔던 야수의 ‘본능’에 결국 함락되고 만다.
‘도시’가 그만의 새로운 유토피아가 될 수 없음을 도시는 폭력으로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다. 떠나온 것을 후회할 순 없다. 소년은 선택해야 한다. 도시를 '정복'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 하늘의 그림자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 '김주혁'
쌍꺼풀 없는 눈은 작지도 크지도 않지만 쉽사리 입 밖으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진중함을 대변한다. 설사 그가 쉴 새 없이 여자 앞에서 건들건들 입을 삐죽거린다할지라도 모양 좋게 모아진 턱선에 시선이 이르면 그의 본심은 대번에 들키고 만다. 사랑이 다가와도, 떠나가도 그는 언제나처럼 턱을 약간 쳐들고 그녀를 위해 괜찮은 ’척’하고픈 반듯한 속내의 ‘남성’이다.
실은 그게 진정한 남자가 되는 지름길인줄 알고 있는 ‘소년’의 배려임을 우린 알고 있다. 한국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장진영)을 위해 하늘의 길을 열어주는 ‘지혁’(김주혁)은 아픈 시대에 좌절하기보다 사랑하는 여인의 푸른 꿈에 ‘동승’하는 넉넉함을 택했다.
높이높이 그녀가 하늘로 날아오를수록 김주혁은 깊게깊게 뿌리를 내릴 것이다.
2005년 12월에 한국영화계의 패권을 노리며 출항준비를 마친 <태풍>, <야수>, <청연>은 각자의 영역인 바다, 도시, 하늘을 제압하며 다른 이의 영토마저 호심탐탐 엿볼 것이다. 어마어마한 덩치로 인해 미처 대결을 피하지 못한 세 영화의 숙명은 흡사 폭풍전야의 고요함마냥 ‘비장미’까지 베어 나온다. 이 또한 라이브한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진검승부를 부추기는 또 다른 언어의 포장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화려한 비주얼과 영상의 스펙터클은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기에 스크린을 압도하는 캐릭터의 카리스마는 일명 ‘한국영화 빅3’가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이자 ‘묘수’다.
‘그’가 다른 이들보다 강하다면 ‘승부’는 의외로 쉽게 결판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