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마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두 남자는 어느 상점을 나온다. 물건이라도 사러 들어간 것 같지 않은 상점은 너무나도 적막하다. 이윽고 한 남자는 물통을 채우기 위해 다시 상점에 들어간다. 그 남자를 따라 들어간 카메라는 피를 흘린 채 싸늘히 식어가는 두 구의 시체를 비춘다. 무덤덤하게 물통을 채우는 남자, 그 옆으로 문이 열린다. 시선을 돌린 남자와 마주친 건 인형을 든 소녀. 겁먹은 소녀를 보며 자신의 입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남자는 소녀를 안심시키려는 걸까. 하지만 그 뒤 따라붙는 건 짧지만 무거운 총성, 그리고 무덤덤한 사내의 표정.
<폭력의 역사>는 시작부터 우발적인 폭력의 상황에 관객을 노출시킨다. 여기서 벌어지는 폭력은 온당히 스크린 너머의 연출이지만 관객은 폭력적 상황의 충격적 체감을 인지해야 한다. 사실 도입씬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씬은 상징적이다. 그건 이 장면이 <폭력의 역사>가 던지고자 하는 화두, 폭력이라는 현상이 포섭하는 영향권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니는가에 대한 논거를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들이밀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거리감을 확보하면서도 그 주관적인 강도는 개별적이다.
<폭력의 역사>는 톰 리들(비고 모텐슨)과 조이라는 이름의 간극에 선 한 남자를 통해 폭력의 알고리즘을 설파(說破)한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한적한 마을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찾아온 우발적인 사건은 치명적인 위협으로 번진다. 그의 평화로운 오늘은 그가 스스로 부정하는 어제의 의혹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린다. 결국 이런 혼란을 해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폭력이다. 폭력은 폭력을 청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활용된다. 이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작업이며, 동시에 청산할 수 없는 폭력의 과오에 대한 속박이다. <폭력의 역사>는 시간의 흐름안에서도 걸러지지 못하는 폭력의 보존성과 함께 세대를 넘는 유전성을 그린다. 과거의 폭력적 잔재가 현재로 넘어오는 과정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성이 아들에게 전이되는 과정은 단순히 한 가정사에 대한 직유가 아닌 폭력적 학습에 대한 전세계적 은유에 가깝다. 그것이 우발적이든 필연적이든 폭력의 영향력은 극단적인 경향만큼이나 전달력이 크며, 방어적인 폭력도 공격성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은 경고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결국 폭력은 행위로부터 튕겨져 나오는 파격만큼이나 그에 따른 폭넓은 책임이 따른다.
<폭력의 역사>는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을 두 번 주목한다. 극 초반엔 여유로운 대화가 넘치는 가족의 아침 식사를, 극 말미엔 긴장스런 정적이 지배한 저녁 식사를. 비슷한 행위는 폭력의 발생과 목격을 거쳐 대비적으로 이뤄진다. 결국 폭력은 행위의 목적과 무관하게 피해자를 양산하고, 의도와 무관하게 행위자를 낳는다. 그 행위의 합당성과 무관한 딜레마는 폭력이 지닌 가장 명백한 가학적 유용함일 것이다.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는 아내(마리아 벨로)를 참담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톰이 마주앉은 식탁의 끝자리가 대치의 정국으로 보이는 건 결국 폭력의 역사가 행위의 순간을 넘는 지속성으로 드러남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 <폭력의 역사>는 여전히 폭력의 순환을 헤매는 이라크의 상황을 보는 것만 같다. 청산할 수 없는 알고리즘, 그것이 폭력의 역사가 거듭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의 순환이 아닐까.
2007년 7월 2일 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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