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다비드(매즈 미켈슨). 한 때는 잘 나가는 화가였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부서졌다. 5년 전의 사고.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는 사이, 어린 딸이 수영장에 빠져 죽는 사고로 모든 걸 잃었다. 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던 다비드는 밤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시간의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을 들어서는 순간, 어쩐 일인가. 5년 전, 딸이 죽던 그 날로 돌아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딸을 무사히 살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던 다비드는 마침 과거의 나와 마주치게 되고 실수로 나를 죽이게 된다. 이때부터 다비드는 과거의 나를 대신해 살게 된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영화다. 아니, 좋은 아이디어를 영화화 한 작품이다. <더 도어>는 2001년 발표된 아키프 피린치의 소설 ‘시간의 문’에서 시작됐다. 발상이 좋은 작품을 만난 감독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 혹은 어려움이 있다. 아이디어에만 도취돼서 정작 이야기의 핵심은 풀어내지 못하는 게 하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내공이 아이디어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 좋은 소재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또 하나다. <더 도어>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다. 완벽하다 할 수는 없지만, 안노 사울 감독은 좋은 아이디어를 제법 안정된 연출력으로 녹여낸다. 대중영화로서의 재미도 상당한데, 여기에 기존 시간 여행 영화들이 품고 있는 깨달음과 이 영화만의 철학적 메시지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기존 시간 여행 영화와 같은 깨달음 이라는 건, 시간을 돌리면 행복해 질 거라는 믿음이, 허상이라는 깨달음이다. 현재의 문제를 과거에서만 찾으려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영화는 경고한다.
반면 이 영화만의 철학적 메시지는 나와 나 사이의 경계, 그 모호한 경계에 대한 물음에서 나온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런 거다. 현재의 나는 나다. 과거의 나도 나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죽인다. 과거의 나는 죽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살아있다. 그렇다면 나는 죽은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내가 나를 죽인 것이므로 나는 살인자인가, 살인자가 아닌가. 과거의 나를 대신해 살게 된 인생은 나의 것인가 아닌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둔중한 여운을 남긴다. 게다가 영화 마지막에는 <트루먼 쇼>를 연상시키는 반전 아닌 반전도 있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다.
2010년 8월 31일 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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