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르 필립, 존 말코비치, 콜린 퍼스, 라이언 필립, 배용준. 이들 사이엔 교집합이 있다. 쇼데를르 드 라클로의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가 정답이다. 그 동안 ‘위험한 관계’는 다섯 가지 버전으로 영화화 됐고, 앞선 남자들은 그 영화 속에서 희대의 바람둥이를 연기했다.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남자가 ‘남자를 돌 같이 보는’ 여자를 어떻게 유혹할 수 있을까. 이야기 발단의 핵심이니, 이 영화들에서 남자 배우의 생김새나 매력은 중요하다. 존 말코비치나 콜린 퍼스의 외모에 동의하지 않았을 관객들에게 <위험한 관계>의 장동건은 근사한 피사체가 아닐 수 없다. <위험한 관계>는 동명소설의 여섯 번째 스크린 진출작이다. “잘생긴 외모가 배우 생활에 방해가 된다”며 한때 달달한 영화를 기피했던 장동건이, 느지막이 자신의 미모를 대놓고 발산한다. 캐릭터만 두고 보면, 여러모로 장동건에게 어울리는 옷이다.
그 반대편에 허진호 감독이 있다. 허진호 마니아들에게 <위험한 관계>는 낯설게 보일 수 있다. 전과 다르게 잦아진 ‘컷 수’와 ‘클로즈업’ 같은 기술적인 부분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그런 변화라면, 이미 그의 전작 <호우시절>에서 눈치 챈 적이 있다.) <위험한 관계>에서 진짜 변화한 건,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다. 허진호의 영화는 산문보다 운문에 가까운, 이야기보다 정서로 읽히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 속에서 연인들은 드라마틱한 사건에 의존하지 않고도,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그런데 <위험한 관계>에서 인물들의 감정은 다소 직설적이고 기계적으로 배열된 느낌이다. 감정보다 사건이 먼저 보인다. 만약 사전정보 없이 <위험한 관계>를 본다면, 이 영화가 허진호의 작품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허진호가 사라진 허진호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혼란스러운 게 사실이다.
<위험한 관계>는 엄밀히 말해 중국영화다. 영화엔 중국자본이 100% 투입됐다. 규모도 크다. 180여 억 원. 웬만한 블록버스터 못지않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화려한 시각적 위용을 자랑한다. 셰이판과 모지에위의 집 등 호화 대저택을 제작하는 데에만 약35억 원이 쓰였다. 눈이 호사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소박한 사진관, <봄날은 간다>의 한적한 산사, <외출>의 적막한 카페, <행복>의 시골 요양원만큼 마음을 붙들어 매지 못한다. 외향은 커졌지만 그 공간을 촘촘히 채우던 여린 감성의 결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눈보다 마음으로 먼저 이해됐던 허진호 영화에서 <위험한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이단아 같다. 그것이 중국자본과 손잡는 과정에서 나온 변화인지, 허진호 감독 개인의 의지에서 나온 변화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새로운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허진호 감독의 도전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이유다.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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