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이름은 인디아 스토커(미아 바시코브스카). 열여덟 번째 생일 날, 믿고 의지했던 소녀의 아버지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다. 앞으로 인디아에게 자신의 생일은 아버지의 기일로 기억될 터다. 그리고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삼촌 찰리(매튜 구드)가 불쑥 나타난 날로도 기억될 게 분명하다. 찰리의 등장으로 인디아의 단조롭지만 평화롭던 일상에 묘한 긴장이 서린다. 엄마 이블린(니콜 키드먼)은 남편의 젊은 시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찰리를 욕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인디아는 본능적으로 찰리에게 날을 세운다. 모녀사이를 애매모호하게 배회하는 남자. 특히 인디아를 향한 찰리의 행동은 음흉하면서도 짐짓 애잔한 구석이 많다. 이 남자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뭘까. 그런 남자를 인디아는 왜 외면하지 못하는 것일까.
잘 알려졌다시피 <스토커>는 <프리즌 브레이크>의 웬트워스 밀러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다. <스토커>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1943)의 그림자가 보이는 건, 박찬욱이 아닌 웬트워스 밀러의 영향이다. 박찬욱은 히치콕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밀러의 시나리오에서 오히려 히치콕의 인장을 덜어내려 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실제로 박찬욱의 손길이 매만져진 <스토커>는 <의혹의 그림자>보다는 그의 전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결과물로 탄생했다. 전작에서 그랬듯 박찬욱이 집착한 건 내러티브의 인과율보다 강렬한 이미지에서 파생돼 나오는 묘한 기운과 여러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상징들이다. 18세 소녀의 피투성이 성인식을 영화는 흔들리는 지하실 조명, 운동화와 뾰족 구두, 다리 사이를 기어오르는 거미 등을 통해 은유적으로 제시한다.
학교와 몇몇 장소를 제외하면 <스토커>의 배경은 극히 제한적이다. 집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 영화의 로케이션이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단연 교차편집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꿈과 현실/인물과 인물/장소와 장소 사이를 영화는 쉬지 않고 교차해 나간다. 그냥저냥 한 장면 전환들이 아니다. 독창적으로 설계된 전환들이다. 이블린의 금발이 갈대밭으로 이어지는 씬을 필두로, ‘소름 돋도록 아름답다’는 다소 낯간지러운 수사를 써도 무방한 장면들이 불쑥불쑥 등장해 눈을 호사스럽게 한다. 이미지를 지나치게 치장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박찬욱 스타일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려울 게다. 이 모든 걸 담아 낸 게 (해외 스태프가 아닌) 정정훈 촬영감독이라는 점에서 <스토커>는 박찬욱의 할리우드 진출작인 동시에 정정훈의 도약으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스토커>와 기존 박찬욱 영화를 가르는 차이를 굳이 찾자면 유머 한 줌 허락하지 않는 냉량한 분위기, 그리고 보다 절제된 폭력 수위와 세련되게 마름질 된 영상이다.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낭만적이기까지 한데, 이는 필립 글라스가 작곡한 ‘네 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곡’을 찰리와 인디아가 함께 연주하는 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섹스라 불러도 무방한 이 장면에서 찰리와 인디아는 그 어떤 애무하나 없이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빨라지는 피아노 선율과 함께 점점 거칠어지는 소녀의 숨소리, 그런 소녀를 달래듯 연주를 살짝 늦추었다가 이내 더 뜨겁게 건반을 몰아치던 남자는 기어코 소녀가 오르가즘을 터뜨리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빠져 꿈꾸듯 사라진다. 감정을 노골적인 대사나 행동에 빚지지 않고도 깊게 길어 올리는 박찬욱의 솜씨가 보다 농밀해진 느낌이다.
이런 <스토커>를 두고 흥행을 점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박찬욱스럽다’는 뉘앙스 속에는 ‘그렇기에’ 열광할 관객 못지않게, ‘그래서’ 꺼려할 관객들도 존재함을 예상케 하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어김없이 사람들의 취향을 탈 테고, 취향 속에서 논의될 것이며,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내러티브상의 구멍들은 누군가에게 분명 공격을 받을 게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자본 속에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확고하게 고수해냈다는 점에서 <스토커>는 박찬욱의 다음 스텝을 주목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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