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1998) - 2
이렇게 그다지 휴머니즘과 관계가 없어보이는 주제의 영화에서 골판지 두께만큼의 깊이만으로 만들어진 별 매력없는 등장인물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얼굴을 찌푸려 가면서 전쟁의 비극과 아이러니에 대해 폼을 잡는다. 도대체가 가증스러워서 말이 안 나온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가증스러운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할 거면 차라리 말도 안되게 영화를 풀었어야 할 것을(바로 [람보 Ⅱ]가 그렇다) 마치 자신이 심각하게 무거운 주제(휴머니즘? 애국심? 전쟁의 비극?)를 이야기하는 양 폼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영화의 맨 앞과 맨 끝에 등장하는 늙은 라이언의 장면들을 보노라면 정말 유치해서 돌아버릴 것만 같다. 80년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유치한 애국심을 강조하던 액션영화들에나 나올만한 장면을 스필버그는 자신의 '에픽'의 앞 뒤에 보란듯이 붙여 놓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주제와 그것을 풀어가는 방법에 있어서의 불일치가 거의 극단을 달리는 정신분열증적인 영화이다. 스필버그는 [태양의 제국/(Empire of the Sun, 1987)]이라든가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1993)]를 통해 이렇게 '심각한' 영화들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는데, 이제는 이런 영화들을 못 만들면서도 자꾸만 만들어야 한다는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조금 더 심하게 말해 [쉰들러 리스트]의 구역질 나는 마지막 장면을 3시간으로 늘려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영화를 말할 때면, 항상 도입부의 전투장면을 빼놓지 않곤 한다. 사실 이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얼마나 '생호러'인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적어도 '호러의 눈'으로 보았을 땐 얼핏 유쾌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까놓고 말하자면, 이 도입부의 전투장면은 '스플래터 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포탄에 맞아 몸통이 산산조각나고, 배가 갈라져 쏟아져나온 자신의 내장을 움켜쥐고 엄마를 소리치는 다 죽어가는 병사의 모습이 보여지며, 잘려진 자신의 팔을 주워들고 전진하는 병사의 처절한 모습이 나온다. 이 영화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단 한 컷도 잘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호러영화 팬으로서는 경악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해에 나왔으나 관객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던, 역시 2차대전을 무대로 한 전쟁영화인 [신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98)]을 보라. 그 영화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처럼 치가 떨릴만큼 과장된 유혈 장면 하나 없이도, 카메라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지 않아도, 1명을 구하기 위해 여섯 명이 몰살당한다는 멍청한 플롯을 억지로 들이밀지 않아도, 늙은 라이언이 묘비를 부여잡고 징징 짜며 유치한 대사를 중얼거리지 않아도 전쟁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때로는 힘있게 표현해 낸 진짜 예술작품이다.
진지하고 아름다운 [신 레드 라인]에 비한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선정주의로 똘똘 뭉친 방정맞고 유치한 영화이다. 이른바 '작품성있는 영화'임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오히려 위선과 허위로 가득차 있으며, 도입부의 전투장면은 '전쟁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쇼크'를 주는 데 급급할 뿐이다. 검열하는 자들은 정말로 이걸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감동'을 받아서? 웃기지도 않는다. 이른바 제대로 된 호러영화에서 보여지는 유혈 장면들이야말로 솔직하고 아름답다([캐리/(Carrie, 1976)]나 [할로윈/(Halloween, 1978)]을 보라!). 어찌하여 보고 나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유혈 장면과 유쾌하고 상상력에 가득 찬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유혈 장면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그 실상에 비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영화이다. 스필버그는 [태양의 제국]에서 이미 포기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를 거쳐 [라이언 일병 구하기]까지 만들어 버렸다. 이제는 제발 그만 좀 나왔으면 좋겠다. 스필버그의 진정한 걸작들을 보고 싶다면, 그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만든 영화들을 보라. 그러면 지금까지 그가 받은 두 개의 아카데미 감독상이 틀림없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자료제공 : www.horrorzone.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