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꽃 기자]
서울에서 생활하던 승희(김유라)는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도로 내려왔다. 제주도보다는 위에, 부산보다는 왼쪽에 위치한 한국 남쪽의 조용한 섬 거제도는 도시 사람에게는 특별한 휴가지처럼 여겨지는 곳이지만, 승희에게는 어린 시절을 지낸 익숙하고 무던한 공간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안부를 주고받던 승희는 초면에 술자리를 권유하는 낯선 남자들과 마주한다. 휴가를 보내러 바다로 달려온 이들의 얼굴은 이미 발갛게 들떠있다. 짧은 즐거움을 누린 뒤 이내 이곳을 떠나 자기 일상을 되찾을 것이 분명한 이들에게 승희는 거리감을 느낀다. 어색한 자기소개와 남자들의 흔한 군대 무용담, 실없는 농담이 오고 가지만 승희는 그 자리에 집중하지 못한다.
승희는 이미 엄마의 옷가지와 갖은 물품을 상자에 고이 넣어 정리를 끝냈다. 하지만 회사에는 휴직계를 냈고, 당장 서울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다. 도시의 삶과 관계에 힘에 부쳤던 그는 이대로 고향에 머무를까, 잠시 생각해본다. 모아둔 돈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자신이 거제도에서 뭘 하고 지낼 수 있을지 막연하지만 그렇다고 치열하게 새로운 무언가를 준비할 기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선풍기를 틀어놓고 늦잠을 자거나, 동네 시골길을 배회하거나, 해 질 무렵 집 밖으로 나가 밭일하는 할머니와 시간을 보낼 뿐이다. 지지부진한 하루가 그렇게 흘러간다. 그야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승희의 심정을 대변하듯 카메라는 인내심 강한 롱테이크신으로 그 일상을 관조한다. 복잡한 연출도, 인물의 극적인 감정표현도 배제한 상태로 흘러가는 영상에 마을의 풀벌레 소리, 바다의 잔잔한 파도 소리, 도로를 지나는 차 소리, 노포에서 흘러나오는 TV 소리가 입혀진다. 연출 당시 승희와 같은 20대를 지나던 오정석 감독은 “뭔가를 해보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가족에게 기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불안한 청춘은, 그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마음속에 담아두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스스로 마음을 달래보려는 승희가 낚싯대를 꺼내어 등대 옆 바다로 향하고 거기에서 이름 모를 조선소 청년(김록경)과 조우할 때, 관객은 으레 어떤 종류의 로맨스나 일말의 휴머니즘을 기대하게 되지만 그 바람 역시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다.
승희와 조선소 청년은 몇 차례 밥과 술을 먹고 낚시도 같이하지만 지나치게 차분한 상태다. 세상을 향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반항심은 고사하고 자기 처지를 비관할 생각조차 없다. 낯선 이성 사이의 설왕설래나 술김에 저지르는 가벼운 실수는 더 사치스럽다. 이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얼굴은 어떤 젊은이들의 표상이다. 자기를 드러내 봤자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 보장된 것 없는 삶의 조건을 극복하지 않는 한 감정놀음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만 승희는 매일 같은 작업복을 입고 같은 시간에 출퇴근하는, 취미라고는 낚시 정도밖에 없는 조선소 청년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인물이라는 걸 감지할 뿐이다. 순대에 소금을 찍어 먹기(서울식)보다는 쌈장을 찍어 먹는(거제도식) ‘동족’으로서 두 사람은 약간의 동질감을 공유하고, 미미한 위로를 주고받는다. 배급사 씨네소파 성송이 대표가 말하는 “끈기 있게 가만히 들여다보는 위로”의 장면들이 그렇게 이어진다.
승희와 조선소 청년이 거제도 유적지인 폐왕성(둔덕기성)에 오르는 시퀀스는 이토록 잔잔한 <여름날>의 클라이맥스다. 한국의 고대국가 신라에서 축조된 폐왕성은 이후 고려시대 들어 무신 세력에게 핍박받은 왕 의종(1146~1170)이 갇혀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가장 탁월한 힘과 능력을 뽐내야 할 인물이 손발이 잘린 채로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공간은 두 청춘의 현재와 조응한다. 바다에 인접한 폐왕성 자락에 다 올랐을 때 두 사람의 시야에는 연보랏빛 하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의 고요한 풍경이 가득 들어찬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크고 작은 섬의 윤곽은 희미하다. 막연히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로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풍경. 이 장면은 유배된 청춘이 보내는 시간 그 자체이자 그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할 삶이다.
언젠가 승희와 조선소 청년의 삶은 지금보다 한층 수다스러워질 것이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종종 세상을 향한 불만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비록 서로는 아닐지 모르지만, 좋아하는 상대와 근심과 애정을 공유하는 인간으로서의 호사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엄마를 떠나보낸 상처를 채 극복하지 못한 승희가 예상치 못한 할머니 죽음과 맞닥뜨린 순간, 어떤 연유에서인지 조선소 청년은 부재하다. 비통함을 나눠 질 누군가 없이 승희는 다시 폐왕성에 오른다. 그리고 홀로 해 질 무렵의 풍경을 바라본다. 멀고 아득한 풍경이 한층 어둡다. 앞으로 승희는 어디로 향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한 청춘의 기다림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이 기사는 영문으로 번역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하는 영문 잡지 '코리안 시네마 투데이' 부산국제영화제호(Vol.37) 실렸습니다.
2020년 11월 6일 금요일 | 글_박꽃 기자(got.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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