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Reality Bites]라는 영화 아세요? 우리 나라에서는 [청춘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개봉되었죠. 아마 이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엄청 많을 거예요. 아직 순수했던 까만 머리의 위노나 라이더와 반항적인 눈빛의 매력남 에단 호크가 출연, '소장하고 싶은 영화' 목록의 상위권을 늘 차지하는 영화. 특히 편의점 장면에서 나왔던 'The Knack'의 "My Sharona" 는 영화만큼이나 유명한 노래로 우리나라 CF에도 쓰이고는 했었죠. 그런데 막 사회에 나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청춘 스케치]가 코믹연기 전문 배우 벤 스틸러의 감독 데뷔작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벤 스틸러, 대부분의 영화에서 바보스러운 연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가 겨우 25살 때 [청춘 스케치]같은 영화를 만들었다니 어딘가 좀 안 어울리는 듯 하지만, [청춘 스케치]에서 성공을 위해 연인을 버리는 냉혈한 '마이클'을 연기한 그를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도 그의 재미있기만 한 바보연기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벤 스틸러가 다시 감독과 각본, 주연까지 맡은 영화 [쥬랜더]. 미국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 2위에 올라 그의 재능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쥬랜더]는 그야말로 '벤 스틸러'다운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을 보면 짐작이 가지만, [쥬랜더]는 말레이시아에서는 상영금지가 되었어요. 수상을 희화화 하고 말레이시아를 가난에 찌든 나라처럼 묘사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죠.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들에게 사실 그 점은 그렇게 크게 각인되지는 않습니다. 우선 벤 스틸러, 아니 쥬랜더를 보는 순간부터 우리는 웃음을 참기 힘들죠. 크지도 않은 키에 얼굴도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먼 그가 스스로 조각같이 잘 생긴 외모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울부짖을 때 이미 비판과 조롱은 우리의 머리속에 없습니다. 벤 스틸러가 만들어낸 패션 모델 쥬랜더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만으로도 반은 채워지기 때문이죠.
[쥬랜더]의 또 하나의 큰 재미는 무엇보다도 영화속에 등장하는 스타들이죠. 쥬랜더의 라이벌 모델 '헨젤'에는 [에너미 라인스]의 오웬 윌슨이 강한 액션 스타의 이미지에서 패셔너블하고 섹시한 모델로 파격적인 변신을 보여주고, [X 파일]에서 미스터리한 사건의 진상을 쫒는 형사 '멀더'로 열연하는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패션산업의 비리를 파헤치는 손모델 'J.P'로 깜짝 출연을 합니다. 쥬랜더의 아버지 역으로는 존 보이트가, 악녀 카팅카 역은 밀라 요보비치가, 그밖에도 데이빗 보위, 위노나 라이더, 크리스챤 슬레이터, 쿠바 구딩 주니어, 나탈리 포트만, 토미 힐피거, 클라우디아 쉬퍼 등 최고의 스타와 모델, 유명 패션계 명사까지 까메오만 20명이 넘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답니다. 그뿐인가요. 쥬랜더의 에어전트 '모리'는 실제로 벤 스틸러의 아버지이고, 쥬랜더와 사랑에 빠지는 기자 '마틸다'를 연기한 크리스틴 테일러 역시 실제 벤 스틸러의 부인이지요.
이쯤되면,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쥬랜더]를 통해 벤 스틸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웃음'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3세계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패션산업계의 비리나, 모두 다른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전부 똑같은 쥬랜더의 표정처럼 상표만 다를뿐 서로 모방하느라 개성을 잃어버린 패션의 흐름이나 겉만 화려한 패션모델들을 비꼬는 것도 좋지만 벤 스틸러는 스스로가 웃음을 주는 코미디 배우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벤 스틸러의 교묘한 바보 연기에 또 속은 걸지도 올라요. 그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게 패션계의 비리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말이죠.)
MTV 같은 화면과 음악들을 서비스하는 [쥬랜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한 이야기들로 이어지고, 진부한 화장실 유머 코드의 변형이 엿보이지만, 웃기 위한 영화를 찾는다면 [쥬랜더]는 꽤 괜찮을 거예요. 벤 스틸러가 창조해낸 좌회전 못하는 모델,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서 약한 내면을 지닌 쥬랜더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안에도 있을지 모르거든요.